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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도희야

정주리, 2013

[한국영화걸작선]도희야 대표 이미지

나는 2014년 5월 개봉 당시 <도희야>를 외면했다. 집에서 도보로 고작 10분 거리에 있는 동네 극장에서도 상영해주던 이 영화를 외면한 것은 줄거리를 보자마자 찾아온 지겨움 때문이었다. KMDb에 게재된 줄거리 첫 번째 문단. “외딴 바닷가 마을, 14살 소녀 도희―빠져나갈 길 없는 그곳에서, 친엄마가 도망간 후 의붓아버지 용하와 할머니로부터 학대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도희 앞에 또 다른 상처를 안고 마을 파출소장으로 좌천된 영남이 나타난다.” 휴. 2010년대 중반 한국 영화계에는 잔혹한 현실을 드러낸다는 명분으로 여성/소녀 피해자의 고난을 전시하는 영화가 드물지 않았다. 그런 영화들은 설령 만든 이의 자세가 진지하고 성실했다 해도 종종 재현의 불온함을 둘러싼 논쟁을 야기했으며, 결말에서 구원이나 복수에 이름으로써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한다 한들 일단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고 있기 거북했다. 더욱이 <도희야>의 포스터 디자인은 자신이 제2의 <도가니>라고 부르짖는 듯했고, 무엇보다도 이미 한 달 앞서 <한공주>가 극장가를 휩쓸고 지나가며 씁쓸한 뒷맛을 남긴 뒤였다. 아동 학대나 시골의 전근대적인 폐쇄성은 분명 중요한 문제이고, 배두나와 김새론과 송새벽은 연기를 잘할 테고, 소재 때문에 힘들게 고민 많이 하면서 만들었을 테지만, 저는 사양할래요.

이런 몰지각한 자에게 그해 연말에 한 번 더 극장 관람 기회를 베풀어준 KT&G 상상마당 영화관과, “정주리의 데뷔작은 처음에는 한국의 어른들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다룬 또 다른 선의로 충만한 휴먼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이내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고 도덕적으로 복잡한 유사 스릴러로 돌변하여 어떤 흔한 멜로드라마적 장치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관객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이해력에 의지해 영화 속의 약자들과 교감해보라고 도전장을 내민다.”라는 문장으로 귀를 솔깃하게 해준 Koreanfilm.org의 김규현 리뷰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덕분에 ‘이런 부분은 좀 별로지만……’이라는 단서 없이 마냥 아낄 수 있는 한국 영화가 하나 더 생겼으니까.

<도희야>를 사회 비판 드라마로 단정하고 지나쳤던 것이 실수였다. 이것은 차라리 <네이키드 키스>(1964), <어여쁜 독 Pretty Poison>(1968), <끼었다 Stuck>(2007) 같은 영화들 옆에 나란히 놓을 만한 필름 누아르다. 가해자-피해자-고발자의 구도는 생각만큼 그리 명확하지 않다. 용하(송새벽)는 몹쓸 인간임에 틀림없지만, 그를 향한 모든 혐의가 사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도희(김새론)는 학대당한 아이임에 틀림없지만, 무력하게 도움을 기다리는 피해자는 아닐지도 모른다. 영남(배두나)은 틀림없이 올곧은 경찰관이지만, 늘 옳은 판단이나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모호한 여백과 뉘앙스 위에 도희와 영남의 관계가 위태롭게 쌓여간다. 둘의 관계는 강직한 사회파 드라마에서 만남 직한 학대 피해자와 성인 보호자의 관계와는 한참 거리가 있으며, 차라리 전통적인 하드보일드 탐정과 팜므파탈의 관계를 재해석한 것에 가깝다. (욕실 장면의 묘사는 <올드보이>나 <아가씨> 정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위험한 금기에 음험하게 도전한다.) 또한 여기에는 분명 아동 학대, 동성애 혐오, 외국인 노동자 착취, 폐쇄적인 시골 공동체의 폭력성 등을 향해 날을 세우는 대목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런 사안들을 고발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 풍요로운 캐릭터와 그들이 처한 환경에 충실하고자 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결과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작심하고 모든 것을 하나의 발언을 위해 때려 박기보다는 이처럼 자기 이야기에 충실한 가운데 비스듬히 찔러 넣는 비수가 더 날카로울 때도 있는 법. 비슷한 예로는 ‘호남 혐오 고발 영화’는 아니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도 호남 혐오를 적나라하게 짚어낸 <비밀은 없다>도 떠오르는데, <도희야> 역시 그만큼이나 컬트적인 인기를 누려 마땅한, 맹독을 품은 독초 같은 영화다.

원고 분량이 다 되어가지만, 배두나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이 글을 맺을 수 없다. 나는 배두나가 좋은 배우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비현실적인 외모를 바탕으로 한 엉뚱하고 외계인 같은 이미지에 크게 의존하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배우의 큰 자산이며 추호도 폄하할 생각은 없으나, 연기 테크닉에 특별히 눈길을 준 적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영남을 연기하는 배두나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의 몰지각함을 반성했다. 한국에서는 흔히 ‘내지르는’ 유형의 연기가 ‘명연’으로 대접받는 편이고, 그래서 <도희야>에서도 김새론에게 더 눈길이 가겠지만(그리고 김새론도 틀림없이 잘했지만), 배두나의 ‘억누르는’ 연기는 특별하다. 특히 용하가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리는 장면을 보라. 영남은 파출소장으로서 아동학대자인 용하를 혼내야 하며, 그럴 권한도 있다. 하지만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데다 난폭한 남자인 그를 너무 몰아세우면 난처해지는 것은 오히려 영남일 것이다. 따라서 영남은 분노하고, 상대를 냉정히 꾸짖음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알려주되, 너무 몰아세워서는 안 되고, 용하가 달려들 틈을 주지 않으면서 체면을 유지한 채 먼저 물러나야 한다. 이 호흡을 배두나는 완벽하게 연기한다. 그러니 <센스 8>을 다 보고 볼 게 없다고 투덜거리시는 분들이여, <도희야>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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