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군더더기
김정아, 2016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물며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를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본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이번 인디다큐페스티발 2017 신작전의 프로그래머를 제안 받고 영화(혹은 창작자에 의해 영화라 불리고자 하는 영상)들을 보며 내내 들었던 질문이다. 웹과 하드웨어, 각종 통신망과 랜선, 창고, 위성 사이에는 (무리해서 이야기하면 뇌까지) 너무나 많은 데이터가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로 공유할 수도 있고 극장에서 상영될 수도 있다. 또한 공동의 공간에서 함께 모여 버튼만 누른다면 언제든지 영화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처럼 영상에 대해 변화된 지각 체계 속에서 영화는 세계와 어떻게 통신하고 빛을 발하는가? 어, 영화의 정의가 달라졌나?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떻게 달라져 가는가? 몇몇 영화들은 나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줬다. 마침 이번 신작전 중 한 작품을 소개해달라는 글 청탁을 받고 긴장과 질문을 안겨준 몇 편의 영화 중 <군더더기> (2016)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희한한 느낌을 준다. 1인 2역을 맡은 남녀 한 쌍이 등장하는 두 개의 시퀀스가 교차 편집되며 기이한 모순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에는 그 누구도 자기 이름으로 등장하거나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면상 보이는 대로의 추측으로만 묘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흡연구역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사/남자, 사진에 찍히는 모델/여자의 시퀀스이고, 두 번째는 카페 테라스에서 여자와 남자의 시선이 서로 교환하는 시퀀스이다.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면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퀀스는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두 장면에서 여자와 남자의 태도는 각기 매우 다르다. 그리고 점점 영화는 더 이상해진다. 서로 붙을 수 없을 것 같은 장면과 시퀀스들이 발에 붙은 굳은살처럼 그렇게 붙어 있다. 상호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과 사운드가 결합되기도 하고, 입 모양과 행동, 말소리가 불일치하기도 하며, 명동과 이태원, 한강, 야외에서의 음악 페스티벌 등지를 카메라가 줄곧 떠도는 데 전혀 즐겁지가 않다. 하나로 결합될 수 없는 이야기를 카메라는 겉돌기만 한다.
영화는 마치, 각기 다른 여러 계정의 ID와 닉네임을 사용하며 말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 ID들을 한데 뭉친 것처럼 굴기도 한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고 있는 것은 핸드폰 카메라나 DSLR로 무언가를 찍는 사람들이다. (찍힌 저 데이터들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여성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자기 인생을 살고 싶었다던 남성의 이야기는 각각 붕 떠 있기만 하다. 앗! 이 둘이 한 영화 속에 함께 나란히 등장할 수나 있는 걸까? 점차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데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혼이 나간 듯 춤추는 장면과 사진 찍는 장면이 교차하며, 거듭 들려오는 DSLR 셔터 소리에 이어 몇 개의 ID들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GPS 신호가 오류를 일으킨 듯 미친 것처럼 딩동거리는 가운데 버려진 폐허가 보인다. 논현동을 같이 걷던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논현에 가면 하나 같이 여자들 얼굴이 다 똑같이 생겼어.” 뒤에 붙은 길거리 장면의 한 성형외과 광고는 음산한 빛을 발하고, 이 영화 속 등장인물로 출연하는 카메라들의 시선과 셔터는 그 순간 곧 어디선가 평가로 기능한다. 붕 떠 있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상기된다. 물이 뒤덮여 흘러넘치는 거리, 거기서 아저씨들은 뒤뚱뒤뚱 걸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한강 다리 아래서 검은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페미니즘의 시작에 대해 이야기하던 얼굴들을 떠올린다.
이후 영화는 도시 밖으로 나가 다른 것을 찾아 나선다. 마치 다른 계정을 새로 만든 듯, 작은 소나무들을 뿌리까지 보이게 재배해 전시하는 한 중년 남성의 공간과 주변 여름날의 초목 사이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영화의 마지막, 도입부와 비슷한 시퀀스가 또 다시 등장한다. 윤상의 ‘가려진 시간 사이로’가 흘러나오는 소나무뿌리주 판매 코너 속에서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여성과 소나무뿌리주의 자태를 구경하는 아저씨들이 교차하는 시퀀스가 그것이다. 영화는 연이어 붙은 두 장면을 통해 한국사회의 말 붙히기 어려운 힘을 발생시키고 끝이 난다. 도입부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도입부에서는 흡연구역과 사진사, 모델이 균등한 크기로 한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세계에 같이 존재하는 반면, 결말부의 노래 부르는 여성과 아저씨들은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컷을 통해 잘려져 있다.
세계를 본다는 것과 찍는다는 일, 장면과 장면을 붙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영화를 통해서만 지각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이상한 지각은 더 가능해질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군더더기>를 경유해보자. 논픽션-다큐멘터리 영화는 얼기설기 파편화된 몸을 한 채로도 세계에 대한 구체적 지각과 각성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며 여러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