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꿈의 제인
조현훈, 2016
* 글에 내용이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스포일러 주의)
누구에게나 마음의 구멍은 있다. 고통스러운 경험 뒤에 오는 충격의 여파로 구멍은 생기기도 하고, 언제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른 채 뒤늦게 뻥 뚫린 구멍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크기와 연원이야 각기 다르겠지만, 마음의 구멍은 누구나 안고 가야 하는 존재의 일부일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커져 버린 구멍에 잠식되어 쓰러지는 사람들을 볼 때나, 자신의 구멍으로 드나드는 칼바람에 한기와 통증이 느껴질 때, 고민은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이 구멍을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이때 부터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진실하지 않았어요. 그거 아세요? 제가 처음 배운 말은 거짓말이었대요. 저는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거예요.”
<꿈의 제인>의 주인공은 ‘소현’이라는 이름의 10대 소녀다. 영화는 그녀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왔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가 처음 배운 말이 왜 거짓말이었는지, 왜 영원히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 단언하는지 알 수 없다. 영화는 그 말이 남긴 물음표를 화두 삼아, 소현과 함께 미로 같은 길을 걸어간다.
영화는 소현이 트랜스젠더인 제인의 팸에서 살았던 전반부와, 제인이 세상을 떠난 뒤 병욱의 팸에 들어가 가혹한 삶을 사는 후반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두 시제가 연속적으로 이어진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각기 다른 역할로 등장하는 같은 인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중첩되는 비슷한 사건과 공간 등을 통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전체 이야기를 다시 재구성하게 만든다. 영화의 어떤 부분은 실제 일어난 일이지만, 어떤 부분은 소현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거짓말이다. 결국 그 재구성을 통해 영화의 마지막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자기 마음의 구멍을 메우려 발버둥 치는 소현의 안간힘이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자신에 대한 환멸,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현은 ‘거짓말’이라는 자구책을 찾아냈다. 소현의 거짓말은 진실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라, 점점 커져가는 마음의 구멍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내기 위한 일종의 안간힘인 것이다. 영화의 서두에 던져진 소현의 말은 그녀가 자기 마음의 구멍을 어떻게 메우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그리고 자신의 안간힘이 결국 미봉책이 될 것임을 그녀도 이미 알고 있다.
가출 팸의 아빠로 나오는 병욱 역시 마찬가지다. 팸의 권력을 쥐고 있는 그는 얼핏 소현의 반대지점에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럴듯한 미사여구와 폭력적인 방법을 교대로 써가며 가출 팸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병욱 역시 소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의 위선과 권위적 행동들 역시 소현의 거짓말과 방법만 다를 뿐 근원은 같다. 결국 지수의 죽음을 분기점으로 그는 급격히 무너지고, 인정욕구에 목마른 연약한 존재였을 뿐인 자신의 밑바닥을 들킨 순간 친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어릴 적 어미나 또래 고양이들과의 함께 뒹굴며 생활해온 고양이는 ‘배움’의 경험을 통해 날카로운 이빨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습득한다. 공격을 위해 무는 강도와 애정 표현을 위해 무는 강도가 어떻게 다른지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움이 없는 고양이가 행하는 애정의 스킨쉽은 상대방에겐 기피와 공격의 대상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소현과 병욱, 그리고 아이들은 너무 일찍 홀로 되었다. 오직 생존을 위해 살아온 그들에겐 본능적인 인정욕구만 있을 뿐 배움의 기회가 없었다. 적당한 시기에 올바른 배움이 체화되었을 때 사람은 인위적인 노력을 애써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관계에 녹아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기를 놓쳤을 때 악순환의 굴레에 빠질 수 있다. 마음의 구멍이 커지고 그 커진 구멍을 메우려는 노력이 오히려 구멍을 더 크게 만드는 악순환. 그래서 어쩌면 소현은 ‘영원히 사랑받지 못 할 거’라는 예감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 소현에게 제인이 나타난다. 소현은 제인으로부터 ‘UNHAPPY’ 라 각인된 손목 도장을 받는다. ‘UNHAPPY’라는 이름의 혜안. 그 짧은 스침을 통해 소현은, 배움의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을 품게 된다. 그 간절함이 결국 실현됐는지, 그냥 상상으로 그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제인을 바라보는 소현의 얼굴은 그 눈빛과 미소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결국 마음의 구멍은 완전히 메울 수 없다는 것. 그 구멍을 껴안은 채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런 체념이 오히려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소현은 이미 자신도 알고 있는 그 배움을 제인에게 다시 확인받고 싶었을지 모른다. 배움의 시기를 놓쳐버린 존재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