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뎀프시롤: 참회록
정혁기, 2014
하루하루를 지낸다는 게, 누구에겐 항상 벅찬 감동이겠지만 내게는 딱히 이럴 것도 그럴 것도 없는 뭐 대충 시계 침 돌아가는 걸 보다가 해가 졌구나, 해가 떴구나, 어딜 가야 되는구나, 뭘 해야 되는구나, 하는 참으로 시시한 것이다. 그러다 보면 화가 나기 마련이다. 나는 왜 제육 덮밥을 먹을 걸 콩나물국밥을 먹었나, 샤워할 걸 왜 세수만 하고 말았나, 담배를 조금 적게 피웠어야 했는데, 커피를 좀 비싼 걸 살 걸 싸구려를 1kg 나 사서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맛없는 커피를 마셔야 하는 게 서럽고... 침대에 누워 이런 구질구질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내 인생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정말이지 깜깜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병구(조현철)은 주목받는 권투선수였다. 그는 ‘판소리 복싱’(!)을 기반으로 세계를 제패할 인재였다. 그럴싸하다. 격투 운동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먹 (혹은 발)을 주고받으며 타격을 한다는 것은, 나의 리듬을 사용해 상대의 리듬을 흐트러트리는 게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는 누적된 충격으로 인해 펀치-드렁크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방금 전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의사는 그에게 치매 판정을 내린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렴풋이 기억해낸다. “저도 예전엔 안 이랬던 거 같아요.” 지금은 비호감에 답답한 사람이지만, 원래는 카리스마 있고, 신명 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친구 교환(구교환)의 흥겨운 장구 장단에 맞추어 적들을 갈아 마시던 시절이 떠오르자, 병구는 다시 글러브를 끼우길 원한다. 그러나 관장(박종환)이나 민지(이민지)는 그런 그가 걱정스러울 뿐이다. 거의 떼를 쓰는 병구에게, 민지는 자신과 한 판 붙어 이기면 다시 권투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훈련에 돌입하는 병구. 하지만 그의 옆엔 휘모리, 자진모리, 굿거리장단을 맞춰줄 교환이 이제 없다.
“사람들 다 미안할 짓하고 사는 거잖아요. 괜찮아요 코치님”
다른 기억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교환에 대한 미안함만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병구에게 민지는 말한다. 병구가 아직 멀쩡했을 때, 권투를 그만두고 나이트 기도를 하던 어느 날 교환은 그를 찾아와 간절히 돌아오기를 요구한다. 길거리에서 장구를 펼쳐놓고 장단 뽑아내던 교환은 비장하게 말한다. “너는 판소리 복싱으로 세계를 제패할 거야.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니까!” 하지만 병구는 그런 교환이 짜증스럽기만 하다. 꺼지라는 말과 함께 친구이자 파트너를 내치고 결국 병구는 망가지고 말았다. 인제 와서 왜 그런 생각이 다시 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참회하고 싶다. 링 위에서 말이다.
<뎀프시 롤: 참회록>은 농담 같은 영화다. 일단 ‘판소리 복싱’이라는 것도 그렇고, 병구가 구사하는 동작들을 보면 이건 복싱이 아니라 오징어 춤을 추는 동작이 더 비슷할 지경이다.(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게다가 교환의 장구 솜씨는 영 형편없다. 그나마 민지의 잽과 스트레이트가 나름대로 각이 조금 잡혀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어쩐지 다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체육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넌지시 전한다. 미안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괴로움에 대해서,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라고. 부정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기를.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으리니... 이미 우리는 죽어가고 있고 지난 것들에 사과할 방법은 없다. 참회, 그리고 다시 해 나가는 것만이 주어졌을 뿐.
영화의 마지막 부분, 병구는 민지에게 스트레이트를 제대로 맞고 다운된 상황에서 과거를 떠올린다. 교환이 떠나기 직전에 해준 재미있는 이야기. “옛날에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었대. 그런데 남자는 다른 여자랑 결혼했고, 여자도 다른 남자랑 결혼했대. 재밌지?” 다운된 상태에서 깨어난 병구는 긴 꿈을 꾼 거 같다고 한다. 꿈속에서 판소리 복싱 같은 걸 했던 거 같고, 관장님도 나오고, 친구도 나오고, 민지 씨도 나오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사랑하는 남자랑 여자가 있었는데... 어, 뭐더라... 아, 맞다.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대요. 농담 같던 영화가 뭔지 모를 진득한 정서로 갈아입는 순간이다.
하여튼 오늘도 별다른 일 없이 해는 지고, 때가 되면 침대에 눕겠지만, 아마도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싶다. 조금 덜 구질구질한 내일을 좀 그리고 싶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판소리 복싱으로 적들을 갈아 마시는 상상을 하던, 병구와 같은 마음을 가진 적이 있지 않았겠는가. 대단할 것 없이, 시시하게, 조금은 다른 기억을 쌓고 싶다. 내일부터는.
P.S : 본 작품은 K’ART 미디어 콘텐츠센터에서 볼 수 있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최근에 막혀 버린 것 같다. (등록된 작품이 전부 막힌 거로 보인다.) 지금 볼 수 있는 경로는 독립영화 감독들의 옴니버스 작품 <서울 연애>를 통해 관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