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9월이 지나면
고형동, 2013
<9월이 지나면>은 창작의 세계를 다룬 단편 작품이다.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레터> 포스터 앞에서 주인공(임지연)이 나카야마 미호의 포즈를 따라 하는 장면이 제법 유명하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다소 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다. 영화에 뭔가 어색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던 것.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시퀀스 하나가 이상했다. 그 장면을 말하기 위해서는 일단 영화의 맨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지연은 건축학도인데,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작업실에서도 자기 자리에만 모기장을 치고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선배 한 명의 설계도를 훔친다. 선배는 상을 많이 받았으니까, 이제 후배들을 위해 양보할 때도 됐다는 게 그녀의 논리다. 그 날 밤 작업실에 있었던 건 그녀뿐이었으니 당연히 의심을 받게 되고, 그녀는 더더욱 혼자가 된다. 건축학도에게 자신의 작업실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선배, 승조(조현철)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지연에게 작업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품게 되는데, 어느 날 승조는 지연의 가방에서 도난당한 설계도를 발견하면서 지연의 비밀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일순간 어색해 지고 지연은 다시 설계도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놓으려고 결심한다.
자, 이제부터 나오는 장면이 이상하다. 지연은 자신이 훔친 설계도를 원래 주인 자리에 가져다 놓으려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다. 꼼짝없이 붙잡혔다 싶을 때 승조가 영웅처럼 등장하고, “나카야마 미호에게 고마워해라” 는 명대사를 날리며 그녀의 모자를 자기가 쓰고는 달아난다. 승조는 자기가 도둑으로 몰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건물 밖으로 내빼는데, 아 이 추격전이 참으로 묘하게 진행된다. 도둑 잡으러 사람들이 달려드는데, 처음에는 2~3명이 쫓다가 점점 추격자들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는 30명쯤 되는 사람들이 마치 좀비처럼 승조를 쫓는다. 이 장면을 눈감고 들으면 남녀의 고함소리가 정말 좀비와도 같다. 여기에 당혹감이 있었다. 독립영화로, 많은 엑스트라를 쓸 환경이 못 되는 작은 영화에서 굳이 30명이나 사람을 채워서 추격전을 만들었다는 것. 게다가 장르를 일순간에 바꾸는 위험을 무릅쓴 채. 처음에는 혹시 코미디를 의도하고 찍은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웃기도 한다.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하고 나서야 이 장면이 이렇게 찍혀야 할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장면의 중요 포인트는 승조를 쫓는 무리에 지연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진짜 범인이 가짜 범인을 쫓는 대열에 합류하는 것. 다시 말하면 설계도를 훔친 당사자가, 내가 잘못한 일을 대신 책임져 주는 인물을 쫓게 되는 황당한 상황. 원래 주어진 역할이 아닌 다른 역할을 하는 캐릭터. 다시 장면들로 돌아가 보자. <러브레터> 포스터 앞에서 지연이 나카야마 미호의 포즈를 따라하는 장면. 그리고 승조가 그녀를 위해서 그녀의 모자를 대신 쓰고 범인으로 가장하는 장면.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해보는 장면이다.
뜬금없지만 영화 <이티>의 초반, 엘리엇은 초콜릿으로 이티를 집으로 끌어들인다. 이티는 엘리엇을 보고, 엘리엇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해 본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티는 엘리엇의 마음에, 엘리엇은 이티의 마음에 ‘동기화’ 되기 시작한다. <9월이 지나면>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이와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추격 시퀀스에 엑스트라가 30명이나 필요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영화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창작자를 구원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같이’ 뛸 기회를 마련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골방에 틀어박혀 있던 창작자가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그들과 같은 곳에 서있어봐야 한다는 것.
추격전 이후 지연은 용기를 내서 설계도를 훔친 건 자기라고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승조가 묻는다. “왜 그랬어?” 아직 9월이 되진 않았지만, 이미 상쾌하게 깨어난 얼굴로 지연이 대답한다. “9월이 지나면 저를 깨워주세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되니, 이제 ‘나’를 드러내는, 창작의 다음 단계가 열린 것이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어요.
순수한 것은 오래가지 못하나봐요.
9월이 지나면 저를 깨워주세요.
Green Day -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