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중고, 폴
김은영, 2015
재작년인가,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이사 준비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미대를 졸업하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먹고 자고 하던 친구였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미술 작업을 그만두고 본가로 들어간다고 했다. 엄마 캥거루가 어쩌고, 주머니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다가 저쩌고, 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는데 나는 그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다 알아듣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의 작업을 늘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 너의 결정이 슬프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 상황이 무척 속상하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이삿짐 차에 주로 실릴 물건들은 그동안 작업한 캔버스 그림들과 자질구레한 미술용품들뿐이었다. 그런데 딱 하나, 이걸 그냥 버릴지, 아니면 팔아서 짜장면이라도 사 먹을지 고민했던 물건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그건 자취방에 흔히 볼 수 있는 50리터짜리 소형 냉장고였는데, 내가 알기론, 그 냉장고에겐 이름이 있었다. ‘폴 앤 니나 (Paul & Nina)’라고... 그러니까 그 친구의 애칭이 ‘폴’인데, (당시) 그의 여자 친구의 애칭은 ‘니나’였고, 그 두 사람이 작업실 겸 자취방으로 함께 쓸 원룸을 계약하던 날, 그 냉장고도 구입하여, ‘폴 앤 니나’라는 이름을 붙여서.. (한...숨) 암튼, 뻔하기 짝이 없지만 닭살 돋게 소중한 히스토리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재활용품센터나 중고물품 가게에 들고 가서 짜장면값이라도 받고 팔려고 했는데 막상 천 원짜리 몇 장 받아서 오자니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하긴, ‘폴 앤 니나’라는 이름까지 붙어있는 냉장고니까... 그래서 그냥 들고 나왔는데 막상 뜨거운 한여름 낮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자니 그만 짜증이 확, 치솟아서 당시 걷고 있던 다리 밑 하천으로 냉장고를 ‘풍덩!’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그 광경이 지나가던 경찰의 시야에 고스란히 잡혔고 친구는 하천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던 냉장고를 ‘직접’ 건져서 파출소로 끌려갔다.
지금부터 나는 이 친구가 그 후 파출소 테이블에 앉아서 경찰들의 눈총을 받으며 써내려간 반성문을 ‘약간만’ 옮겨보려고 한다, 파출소에서 나올 때 담당 경찰에게 복사를 부탁해 갖고 왔다고 했다. 힘들 때 가끔씩 읽어보고 싶었다나? (예술가들이란~~) 그가 나에게 보여준 이 글을 읽으면서 난 이 반성문을 트리트먼트 삼아 단편영화를 하나 만들어보라고 친구의 예술가적 허세를 부추겼다.
“반성문.
안녕하세요. 저는 아침만 해도 이사를 가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쓸 만한 냉장고를 버려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활용센터 사장님으로부터 그냥 버리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서부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어서 좀 더 시원하게 버릴 수 있을 때까지 무작정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천 아래로 가라앉지 못하고 반쯤 둥둥 떠 있는 냉장고를 보면서 그제야 제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근래 집주인 아주머니께서도 그런 제가 못 미더워 몇 달째 했던 말을 반복하고 계시는데, 밀린 월세를 내라고 하며, 환경을 바꿔보는 게 좋을 거라고도 하고, 제가 너무 게으르다고도 했습니다.
냉장고만 잘 처리하고 나면 이사를 갈 것입니다. 50리터 냉장고... 완벽한 냉동실도, 완벽한 냉장실도 아닌 이 애매함은 그저 예전 여자친구가 남겨놓고 간 것입니다. 또 남은 것들 중에는, 제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선물했던 비싼 색연필과, 한 여자가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한 점이 있는데... 그녀는 늘 사는 게 헤엄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저희는 이 동네 미대를 나왔습니다. 남들이 인정할만한 직업은 없고, 종종 벽화로 돈을 벌었습니다.... (하략)”
자, 여기까지가, 중고 냉장고를 무단투기하는 현장이 경찰에 적발되었지만 다행히 전후사정이 참작되어 반성문을 쓰는 것으로 훈방 조처된 ‘내 친구’의 이야기로 ‘포장’한 단편영화 <중고, 폴>의 소개 글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는 이 반성문을 보고 들으면서, 주인공 남자에게 어떤 일이 생겼던 것인지, 어떤 이유로 냉장고를 버리려고 했으나 결국 버리지 못하고 이사를 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자취방과 작업실을 공유하며 미술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 커플이 이 영화의 제작과 연출을 맡았는데, ‘애지중지 키우던 고추 모종을 몰래 훔쳐간 범인을 찾아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여자’가 주인공인 이야기 <고추가 사라졌다!>가 이들의 첫 영화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이들은 진짜로 자신들에게 벌어졌거나/벌어졌던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거의 아름다울 정도로 단편스러운 러닝타임에 맞춰서 생각해내는 단단한 아티스트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 두 영화가, 비록 영화적인 센스는 위의 소개 글이 주는 기대치만큼 재치가 넘치거나 세련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이것이 실제로 그들에게 벌어졌던 진실한(authentic) 에피소드처럼 ‘보인다’는 것에 나는 즉각적인 호감을 느낀다.
“진짜로 있었던 일 맞지?” 친분을 이용해 고집스레 물어봐도 이들은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지난밤의 숙취로 어질어질하면서도 도둑맞은 고추 모종을 찾으러 다닌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이 여성감독의 귀여운 경험이고, ‘벽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하고 성실한 미술작가들’은 이들 커플에 대한 실제적인 묘사이지만, 높은 건물에서 벽화 작업을 하다가 크레인이 추락해 사망한, 가난한 미대생의 안타까운 죽음은 어쩌면 순수한 픽션이라서 할 말이 없었거나, 그 세계 속에 살아보았던 사람들끼리만이 짐작하고 숨길 수 있는 비밀이자 상처라서 꼭꼭 숨겨야 했기에 차마 말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내가 좀 더 보고 싶었지만 나오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가난하고 어두우며 무서운 세계에 대한 이들만의 코멘트였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도 연출자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이러더라. 못한 말이 있으면 다음 작업에서 하겠다고.
그래서 나는 이들 커플이 내놓을 세 번째 영화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요즘 이들은 장편 그래픽 노블 작업에 열심이라고 한다. 암튼, 최근 애니메이션 작업이 추가되어 완성된 <중고, 폴>이 첫 번째 영화 보다는 좀 더 많은 상영기회를 얻게 되어 이들 커플에게 기분 좋은 차기 작업의 동기가 되었으면 바라는 마음에서 추천사를 참 길게도 써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