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또 다른 박종필들 3
한 달 전이었다. 겨우 한 달 전의 일이다. 마감 때문에 저녁을 못 먹고 늦게까지 일한 날이었다. 속이 쓰렸다.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어두운 길을 걷고 있었다.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전화한다며 짐짓 건조한 말투였지만 떨림이 가득했다. 음색만으로 겁이 났다. “일란이 많이 아파. 위암이래.”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 그리고 후속작인 <공동정범>을 만든 김일란 감독의 소식이었다. 상황에 대한 설명이 계속됐지만 그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화가 났다. 목구멍이 먹먹해지고 빈속이 뒤집어졌다. ‘왜?!’란 말만 되뇌었다. 어두운 길이 현실적이지 않게 캄캄했다. 그러다 문득 지난겨울이 떠올랐다.
촛불이 가득 찬 광화문 거리, 집회가 매주 이어지던 어느 주말이었다. 모여 있던 미디어 활동가와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집회 행진을 촬영하러 흩어졌다. 캔커피로 언 손을 녹이는 데 상황실을 맡고 있던 김일란 감독이 “한주도 안 쉬었어. 진짜 힘들다”라며 툭 진심을 꺼내 놨다. 웬만해선 힘들다는 이야기를 안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당황스러웠지만 그게 우리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을 나누지 못해 미안하기만 했다. 미디어 활동가들과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은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주류 매체가 외면했던 거리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작년 겨울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자기 ‘역할’을 다 하며 거리를 지켰다. 그 자리에 박종필 감독도 있었다.
김일란 감독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요일 오후였다. 전화가 왔다.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를 배급하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곤욕을 치룬 시네마달의 대표 김일권 피디였다. 세월호가 인양된 후부터 목포에 내려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촬영 중이던 박종필 감독의 소식을 전했다. 7월 초부터 연락이 안 돼 다들 걱정하고 있던 박종필 감독을 만났단 말과 함께 그가 간암이라고 했다. 그리고 알고 있어야 할 사람들에게 전화 중인데 다른 이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박 감독이 원치 않는다고. 당부했다. 세월호 촬영 중에 아프면 사람들이 세월호 때문에 아픈 거라 할 테니 그럼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안 된다고. 병세로 변해가는 자신의 낯선 몸을 마주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염려하고 배려한다. 박종필 감독은 내겐 큰 선배이자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의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은 유난히 멋졌다. 그런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샘났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주인공을 피사체로만 여기지 않고 그들과 삶을 나눴고 그로 인해 그의 주인공이 더 멋져 보일 수 있단 것은 나중에 알았다. 20년 동안 박종필 감독은 99년 <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실직 노숙자 >를 시작으로 무수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홈리스운동과 장애인이동권운동을 함께했다. 최근에는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과 퇴진행동 미디어팀에서 활동했다. 독립다큐멘터리만을 상영하는 영화제인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어려운 재정 상황에서도 같이 꾸렸다. 그는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원칙주의자여서 종종 주변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원칙들에 선뜻 동의가 돼 구박하면서도 함께했다. 존재 자체가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박종필 감독 덕분에 덜 외로웠던 사람들이 내내 함께 했다. 다행히 가는 길 외롭지 않았다.
두 감독의 일은 대부분의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자신의 일처럼 충격을 줬다. 그들 대부분이 제작비와 생활비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며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만나면 건강검진은 하고 있는 지 묻게 된다. 하지만 건강검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란 걸 잘 안다. 7년 전 생활고에 생을 마감한 숲속 홍길동이라 불렸던 이상현 미디어 활동가가 있다. 이상현은 장기투쟁사업장을 누비며 외로운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회사의 폭력을 기록하고 경찰의 탄압을 기록했다. 그런 그가 생을 마감할 때는 단순히 생활고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 미래가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떠나고 그가 지켰던 투쟁사업장들이 나섰다. 그와 그의 카메라 덕분에 경찰에게 덜 맞았고 덜 외로웠다며 마음을 모았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이 주축이 돼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이하 현카)이란 지원제도를 만들었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10년 넘게 비정규직 투쟁을 했다. 그 현장에도 이상현 영상 활동가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박종필’인 김천석 미디어 활동가도 있었다. ‘현카’는 제목 그대로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주기 위한 지원제도다. 여느 지원제도와는 달리 활동에 지원해주는 제도다. 지원의 성과로 영화가 나오지 않아도 된다. 생활비로 써도 되는 지원금이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후원금으로 일 년에 한번 지원한다.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의 현물지원도 있지만 한 팀이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은 많아야 200만원이 전부다. 지원금으로 밀린 월세를 낸 감독도 있고 새롭게 들어가는 작업의 장비를 장만한 감독도 있다. 적은 지원금이지만 그들에게는 작업을 계속하라는 메시지로 활동을 계속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올해는 6팀에게 지원을 했다. 개인의 마음이 모인 후원금이라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지원해야 할 곳은 많고 지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매번 드는 생각은 개인의 선의로만 우리의 삶이 유지돼야 할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고 시스템 속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시스템은 너무 멀고 혹은 우릴 외면한다.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이 내게로 온전히 전해지면서 버거웠지만 또한 무뎌져서 흐릿했던 지난 십 년의 시간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상황을 그저 버티고만 있었다. 가장 가까운 시스템은 영화진흥위원회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문화가 아닌 상품으로만 여기는 영화진흥위원회는 독립영화를 골방의 몇몇을 위한 영화로 치부했다.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의 명칭을 교묘히 변경하며 독립영화의 자리를 협소하게 만들고 관련 인프라를 파괴해 관객을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 방향의 변화를 분석한 「무엇을 위한 진흥인가? 영화진흥사업의 목적과 비전 그리고 흐름」(김지현, 독립영화 정책연대, 중앙대학교 전임연구원)를 보면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동안 어떤 환경에서 고군분투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산업과 영상문화의 조화로운 발전’을 한국영화진흥종합계획의 비전으로 삼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구를 찾아볼 수 없다. 최근 세부사업을 보면 ‘투자자본 안정화/투자출자사업’이란 사업에 전체 예산의 30%를 사용하고 있다. 문화는 빠지고 오직 산업으로서 영화가 있는 것이다. 정작 창작자들을 위한 지원은 8.6%가 전부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독립다큐멘터리의 공공성에 대해 강조하고 싶었다. 독립다큐멘터리가 이 사회를 위해 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독립다큐멘터리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그것을 진흥해야 하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산업만을 중심에 놓고 사업을 펼치고 있는 현실에서 또 다른 오독을 만들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새롭게 제정된 <문화기본법>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제4조(국민의 권리)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이하 ‘문화권’이라 한다)를 가진다.” 독립영화를 한다는 것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공공제로서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아주 보편적인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권리를 행하면서도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더 이상 억압받지 않아야 한다. 아프지 않고 억압받지 않으며 작업하고 싶다.
P.S. 태준식 감독의 칼럼 ‘또 다른 박종필들’(한겨레 시론 8월 1일 치)와 김동령 감독의 칼럼 ‘또 다른 박종필들 2’(한겨레 칼럼 8월 7일 치)에 이어서 제목을 ‘또 다른 박종필들 3’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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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사진은 오마이뉴스 기사의 사진을 활용하였습니다. ⓒ 최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