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현장
[영화현장]영화 <걷기왕>과 백승화 그리고 나
이 글은 오는 10월 20일 개봉하는 영화 <걷기왕>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일하는 직장은 독립영화를 전문적으로 배급, 제작하는 (주)인디스토리다. 인디스토리는 십 칠년을 한결같이 독립영화, 단편영화와 함께 하고있다. 아무튼.
백승화 감독 첫인상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인디스토리에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의 배급의뢰를 백승화 감독 자신이 했는지 아님 프로듀서가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차저차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을 배급했다. 난 배급담당이 아니라 백승화 감독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간혹 수염 난 로커가 사무실을 들락거려서 신기하게 바라봤을 뿐.
그 이후에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의 주인공 밴드 중의 하나인 ‘갤럭시 익스프레스’가 미국 투어를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백승화 감독이 투어 다큐를 찍고 싶어 했다. 당시 회사에서 제작비를 쏠 정도의 재정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촬영 기간이 짧고 미국투어에 숟가락 하나만 올리면 되는 상황과, 그리고 백승화 감독 본인이 진정한 멀티인이기 때문에 수공업이기는 해도 본인의 힘으로 영화를 완성할 것 같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사실 제작비가 작게 들어간다는 장점이 가장 컸다.) 감독은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반드시 크게 들을 것 2: WILD DAYS>를 완성했다. 자잘한 C.G는 물론이고 편집도 거뜬하게 해놓는 것을 보면서 이 시대의 ‘참 영화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본인은 잘하는 게 없다고 하지만, 나보다는 능력이 탁월하다.
다큐멘터리 두 편과 한 편의 단편영화(<지각생들>(2012)) 경력, 그리고 다재다능함만 있는 감독이 어느 날 불쑥 장편극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긴가민가했다. 시나리오 쓰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백승화 감독의 학부 전공은 애니메이션이다.) 재능 많은 감독들이 시나리오 앞에서 좌절하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에, 백승화 감독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 가지고 온 아이템은 (최종적으로 시나리오 형태로 완성된 게 아니지만) 인천의 쇠락한 볼링장을 배경으로 한 볼링천재 소녀의 이야기인 <데굴데굴 볼링왕>이었다. 인천이니까 <천하장사 마돈나>의 느낌으로 가보려고 했지만, 진행이 잘 안 되었다. 시나리오 개발한답시고 백승화 감독과 같이 인천역 부근 크라운 볼링장에서 같이 볼링도 치고, 유엔공원 산책도 하고 월미도에서 회 먹었다. 회사엔 비밀. 지금도 이 시나리오에 대한 애착이 많아서 꼭 한번 시나리오 작업을 다시 해보고 싶다. 그리고 두 번째 나온 아이템이 <오목소녀>다. 오목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는 소녀의 이야긴데, 바둑이 아니고 오목이라서 더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보면서 혹시 하는 마음으로 <오목소녀>를 만지작거렸다.) <오목소녀> 이야기도 끝을 못 보고, 이래저래 고민하던 차에 불쑥 등장한 것이 바로 <걷기왕>이었다. 멀미 증후군을 가진 고등학생 만복이가 경보를 한다는 이야기.
생각해보면 볼링도 그렇고 오목 그리고 경보라니, ‘마이너’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감성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볼링을 통해, 오목을 통해 경보를 통해 성장해가는 인물들이 주인공들이다. 주변에서 신경도 안 쓰는 마이너한 인생들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좌충우돌. 그 속에서도 “무조건 잘해라”, “일등 해라”가 아니라 “못해도 괜찮아”, “천천히 걸어가도 좋아”. “네가 하고픈 대로 살아도 괜찮아”. 이런 이야기는 인디밴드 출신인 백승화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된 것 같았다. 감독의 진심이 이럴진대, 사실 내가 거드는 것은 사족들이었고, 온전히 감독의 마음이 관객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두툼한 초고를 놓고 제일 먼저 선택한 것이 인천영상위원회 제작지원 사업이었다. 영화의 주된 공간이 강화도였고, 백승화 감독 본인이 ‘인천의 영화 아들’이란 점을 면접에 내세워서 거금 3,000만원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게 <걷기왕> 탄생의 서막과 이후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천영상위원회 관계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실 지원금만으로는 영화를 찍을 수 없었고, 막막한 상황에서 탈출구를 열어준 게 (지금은 사라진 것 같은데) 독립영화제작펀드였다. 이야기하면 알 정도의 독립영화 선수들이 모여서 서울독립영화제 장편프로젝트로 의기투합하여, 독립영화제작사에서 준비 중인 프로젝트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걷기왕> 시나리오로 진행하려는 중 제작펀드가 갑자기 공중 부양했고, <걷기왕>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지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개봉을 앞두고 있다. 구사일생의 중요한 주인공이 심은경 배우다. 심은경 배우가 <걷기왕>에 출연하겠다고 하고 사무실로 계약서를 보내온 날, 기분 좋게 취해서 집에 들어가는 길에 나 홀로 춤을 췄다는 것도 비밀. 감사합니다. 심은경 배우님.
힐링의 끝자락, 위로고 뭐고 다 필요 없는 세상이지만, <걷기왕>의 진심이 관객들에게 가 닿기를 희망해본다. 그리고 영화를 끝까지 지켜주고 온전히 탄생하게 만들어준 이정환 피디, 한상록 피디와 스태프들, 배우들, 관계자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