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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현장]소셜포비아 PD인 나는 어떤 일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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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로듀서란 무슨 일을 하는가’ 라는 주제의 칼럼을 써주지 않겠느냐는 원고 청탁을 갑작스럽게, 사무실 옆 테라스에서 받았다. 영화 프로듀서의 역할을 잘 모르는 독자들이 많고, 현장의 이야기를 다룬 글의 반응이 좋다며 편집자는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역에 있지도 않은 데다 PD로서의 경험이 많지 않아 이런 글을 쓸 깜냥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거절하다 그럼에도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 개인적으로도 영화계 지망생 또는 시네필들에게 많은 문의가 왔었고, 내가 이 글에서 주로 언급하고자 하는 한 편의 영화, <소셜포비아>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특이한 시작과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소견이 나를 지배한 이유에서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영화 제작은 사실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①시나리오 ②사람들(감독, 배우, 스태프) ③예산 ④시간 이렇게 네 가지의 희소한 자원만 있으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영화를 ‘찍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상당히 느낌이 다르다. 물론 모든 영화인들은 영화를 ‘영화’처럼 만들려고 하니까 당연히 쉽지 않은 작업이 되는 결과에 봉착한다. 위 네 가지를 숫자 표기까지 하며 언급한 까닭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영화 제작에서 중요함의 우선순위를 강제로 나열하기 위해서지만, 사실 각각의 이해관계가 촘촘히 얽혀져 있어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 프로듀서는 업무에 따른 역할과 책임에 따라 세부적으로 나뉜다. 영화의 제작 케이스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 종류에는 프로듀서, 기획 프로듀서, 라인 프로듀서(Line Producer, 우리나라에선 제작실장이라고도 불린다), 이그지큐티브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 우리나라에선 제작자 또는 대표님이라고 불린다) 등이 일반적이다. 업무가 구분되어 있지만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화 프로듀서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작자(일반적으로 제작사 대표)에게 제작 권한을 위임받은 1인 또는 다수의 프로듀서로서, 영화의 기획 시점부터 개봉까지 영화 제작과정을 총괄한다. 일반적 상업영화 기준으로 제작사와 시나리오, 감독, 배우 정도가 윤곽이 잡히게 되면 투자를 받거나, 거꾸로 투자를 받아 그를 통해 감독, 배우가 정해지는 등 유동적인 시스템 속에서, 투자 이후부터 개봉까지 시나리오 탈고와 캐스팅, 스태핑, 예산, 스케줄, 제작 진행, 후반 작업, 개봉까지 영화 제작 전반의 과정을 진행... 

...역시 재미가 없다(사실 나도 잘 모른다). 프로듀서의 역할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 등은 영화 관련 서적과 인터뷰, 인터넷에 정보가 무더기로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대신하여 내가 PD로 참여했던 <소셜포비아>의 제작 과정을 제작기 형식으로 전하도록 하겠다.

2013년 여름 어느 날, 이전부터 여러 작업을 함께 해왔던 이성중 촬영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장편제작연구과정에 선발되어 <소셜포비아>라는 장편을 준비 중인데 프로듀서가 필요하단다. 일반적으로는 프로듀서가 촬영감독을 섭외하는데 이 영화는 학교에서 제작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학생인 감독과 촬영감독이 프로듀서를 찾았던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프로듀서를 하기에는 나의 경험이 스스로 염려되었거니와 당시 막 <타짜-신의 손>의 제작팀에 들어갔기에 그의 부탁을 고사했다. 그러나 <소셜포비아> 라는 제목이 주는 기묘한 매력 때문인지 시나리오를 읽고 싶은 마음에 도통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연속이었다. 결국 시나리오를 받아 단숨에 읽어보고서는 무릎을 탁 쳤다. 거칠고 어수룩한 초고였지만 영화의 소재와 스타일, 인물들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 영화 만들고 싶다’라는 강렬한 욕구가 용솟음쳤고 바로 감독과 미팅을 잡았다. 

종각역 어느 카페에서 홍석재 감독과 이성중 촬영감독과 나는 70페이지가량 되는 초고를 놓고 둘러앉았다. 홍석재 감독은 당시 단편영화 <킵 콰이어트Keep Quiet>로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므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이런 ‘덕력’ 가득한 시나리오를 쓰는 오타쿠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매우 컸다. 기대와는 다르게 꽃사슴같이 예쁜 외모는 나의 편협한 시각을 반성하게 만들었지만 당시 그의 행색은 영락없는 오타쿠 영화감독 꼴이라 나름 안심하기도 했다. 미팅을 주선한 이성중 촬영감독은 우리들 중 가장 연장자로 무척이나 아날로그 한 감성을 소유한 심성 탓인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근래의 디지털 문화와 과도하게 그 문화에 쏠려버린 인물들의 심리 등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는데, 때문에서인지 홍석재 감독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기이한 현상과 문화에 대해 나름 빠삭(?)하게 알고 있는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첫 만남은 시나리오 얘기보다는 시덥지않은 인터넷, 게임, 만화책 얘기만 실컷 하다가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 악수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영화 제작이 시작되었다. 나에겐 전도유망한 젊은 감독과, 20살 때부터 영화를 시작해 당시 영화 경력이 14년에 이르는 베테랑 촬영감독과, 지금 생각해도 너무 적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일금 육천만 원의 예산과, 다듬어지지 않아 아직 돌덩이 같은 시나리오와, 준비 기간과 촬영 기간을 포함한 5개월의 시간과, 동료 영화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기 위한 아이폰이 있었다. 예산이 적은 것 빼곤 꽤 괜찮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주승(왼쪽)


변요한


류준열

감사하게도 꽤 괜찮았던 캐스팅이었다는 평을 들었지만 최종 캐스팅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감독은 주연 중 ‘용민’ 역에 이주승 배우를 콕 집어 캐스팅 의사를 밝혔는데 나를 비롯한 제작진 모두가 동의했다. 가장 중요한 주연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신뢰할 수 있고 반짝이는 배우가 붙어주어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캐스팅이란 배우의 섭외뿐 아니라 제작진 안에서의 합의 과정까지 포함된다는 점을 상기하자. ‘지웅’역을 위해 꽤 많은 오디션과 배우 미팅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캐스팅 보드 맨 위에 있던 변요한 배우로 최종 낙점됐다. 당시 <들개>(김정훈, 2014)가 동경영화제에 초청되어 일본에 가 있던 변요한과 전화로 미팅을 잡고, 귀국하자마자 지체 없이 만났다. 주연배우들의 미팅 이후 계약까지, 캐스팅이 수월했던 건(눈물 나는 계약금의 설득은 수월하지 않았다) 시나리오의 공이 컸다. 극 중 처음부터 끝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건을 진행하는 ‘현피 멤버’는 그 수가 무려 일곱이었는데, 배우 한 명을 볼 때 어느 역할 하나를 콕 집어 캐스팅하려고 하기보다는 여러 캐스트 중 어디에도 들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캐스팅을 진행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류준열 배우를 ‘BJ양게’ 역으로 만나게 되었다(원래 류준열은 다른 역할로 오디션을 봤었다). 감독과 나는 BJ양게 역의 캐스팅을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었는데, 시나리오 수정을 위해 감금시켜놓은 감독 대신(결국 시나리오는 탈고하지 못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연출부가 진행한 오디션의 영상을 돌려보던 나는 류준열 배우의 BJ방송 진행 연기 영상을 보고 바로 감독에게 추천했고, 오디션 영상을 본 감독은 박수를 쳤다. 써놓고 보니 너무 순조로운 것 같지만 말 못할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노량진에서 경찰시험을 준비하는 인물들의 영화를 만드느라 촬영 이전부터 노량진에 수십 번을 갔다. 실제 노량진에서 경찰시험을 준비했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컵밥을 먹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져버린 노량진 육교를 수십 번 건너고, 500명의 학생이 한 강의실에 들어가서 수업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촬영부는 카메라와 함께 담요를 뒤집어쓰고 강의실 구석구석에 숨어 세 시간 동안 경찰학 강의를 들었다. 노량진이라서 좋았던 것은 3천 원으로 뷔페식 식사와 과일에 라면까지 마음대로 끓여 먹을 수 있는 ‘고시식당’이었는데, 많은 제작진들이 좋아해서 다행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단가가 나올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세 군데가 넘는 경찰서에 협조를 구해 촬영을 하다 어느 한 곳에서는 쫓겨나기도 했고, 옥탑방에서 자살 신을 찍다가 경찰에 신고가 들어와 영화촬영을 설명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예산이다. 매일 아침은 김밥이고, 현장에 간식은커녕 물 외에 다른 음료도 없었다. 배우, 스태프들 모두와 계약을 하긴 했지만, 계약서상 금액을 보면 허탈한 웃음이 났다. 발전차를 쓰지 못해 그 무거운 발전기를 모든 회차에 들고 다녔고, 가게에서 전기를 빌려다 길바닥에서 분장을 하고, 의상 실장은 배우, 스태프들의 옷을 빌리기 위해 그들의 빈곤한 옷장을 털었다(인물들의 설정이 고시생이어서 다행이었다). 지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지만 손난로를 추가로 살 돈이 없어서 ‘영하 10도 이하인 회차에만 손난로를 준다는 기준을 세워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다 울컥했다. 촬영 중 대기할 공간이 없어 24시간 맥도날드에서 밤을 새우다 쫓겨나고, 깎고 깎아서 세트에 들어갔지만 시간을 초과해 촬영 종료한 척 문을 잠그고 세트장 직원 몰래 조용히 찍다가 쫓겨날 뻔했다. 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예산이 1억 가까이 늘었다는 말을 듣고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억울했다. 











<소셜포비아> 촬영현장

영화는 절대 혼자서 만들 수 없다. 한 쇼트의 탑에서 엔드까지, 시각적, 청각적인 표현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한다. 각자의 분야에서 논의와 고성이 오가고, 서로 기대고 도와가며 영화를 만든다. 프로듀서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영화의 완성까지 이끌어 가는 스태프인 것인데 나의 경우에는 예산을 이유로 너무나 척박한 환경을 제공해 우리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역류성 식도염, 원형 탈모, 간헐적 혈변이 익숙해지는 때가 되니 영화의 촬영이 끝났다. 몇 번의 추가촬영까지 진행하고 후반 작업이 시작되었다. 서교동 한국영화아카데미 3과 1/2층에 가면 맥(Mac) 몇 대가 놓여있는 매우 좁은 편집실이 있는데, 각자 자리의 구획을 나누기 위한 파티션이 철창으로 되어있어서(거짓말이 아니다.) 몇몇 감독들이 마치 유치장과 같은 곳에서 감금당해 편집하는듯한 기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몇 개월간의 감금(편집)과 후반 작업이 끝나고 영화는 완성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프리미어 상영을 했다. 모든 상영이 매진됐고, 박수가 나왔다. 두 개의 상을 수상했고 잡지와 매체에 <소셜포비아>가 소개되었으며, 우리는 계속 트위터를 새로고침 했다. 홍석재 감독은 단편 영화들을 만들 때부터 영화제에 초청되어 수상하면 상을 꼭 두 개를 탔는데, 이쯤 되면 영화계의 홍진호, 또는 영화계의 용개라고 불려야 할 것 같다. 몇 번의 국내외 영화제를 다녀오고 해가 넘어가서 개봉을 하게 되었다. <소셜포비아>를 만들 당시 나는 우리 배우들에게 “수퍼스타가 될거야” 란 말을 습관적으로 말했는데, 그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다. 배우들이 수퍼스타가 된 덕분에 <소셜포비아>는 독립영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많은 상영관을 가지고 개봉했다. 

저예산 독립영화였고, 배우들은 무명이었고 감독을 포함한 많은 헤드 스태프들이 장편 데뷔하는 작품이었다. 척박하고 궁핍했고 추웠지만 우리는 치열했다. <소셜포비아>의 프로듀서로서 부족하고 아쉬운 점은 너무 많았다. 프로듀서로 참여해 큰 즐거움이 한가지 있다면 처음 기대한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논하고 비평하며 현실 사회를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 감독과 촬영감독과 함께 논했던,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의도했던 대로 말이다. 또 한 가지, 함께 했던 동료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배우들은 스타가 되었고, 감독은 계약했고, 촬영감독과 미술감독, 조명감독은 또 다른 장편을 만들었다. 막내는 <옥자> 제작팀에 들어가서 브래드 피트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수집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담당자로서 마지막 한 마디. 우리의 영화유산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소중한 자료의 기증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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