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현장
[영화현장]<최악의 하루> 제작기
김종관
<최악의 하루>의 시나리오 초고는 4일 만에 썼다. 최악의 여자로 몰리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 여자라는 콘셉트가 만들어지고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가 노트에 담기고 나서 아주 빠른 속도로 시나리오가 나왔다. 너무 빨리 써져서 나 스스로도 놀란 기억이 있다. 2014년 겨울에 썼고 그 후 몇 번의 손질을 하고 제작사와 투자사를 알아보고 2015년 이른 봄부터 캐스팅 진행을 하다가 여름으로 진입하는 사이 배우 캐스팅이 정리되면서 영화 제작이 가시권에 들었다. 8월부터 대략 한 달 넘게 프리 프러덕션이 진행됐고 9월 중순에 크랭크 인 해서 한 달의 기간 16회차라는 기간으로 프로덕션이 마무리되었다. 그 정도면 장편 영화로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0월 중순에 촬영이 끝나고 두어 달의 편집 기간을 마치고는 잠시 진행이 멈춘 게 위기였다. 영화의 후반 작업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1차 편집본으로 후반 투자와 배급을 알아봤다. 다행히 후반 투자와 배급을 얻었고 음악 믹싱 등의 후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후반 작업 기간은 초반의 속도와는 다르게 약간 더뎠지만 6개월 정도의 기간 안에 다 마무리 지었다. 시나리오를 기획하고 쓰고 영화를 찍고 마무리하는 데까지 일 년 반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그 또한 빠른 속도로 영화가 마무리된 셈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일사천리의 순항만으로 영화를 마무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작품의 개발 과정을 연출자가 겪어 온 다른 과정으로 정리하면 다시 아래와 같다.
옴니버스 형식의 장편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를 어느 가을에 개봉하고 그 이듬해부터 다음 장편을 준비하기 시작해서 햇수로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5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하면, 나름 바쁜 시간들이었다. 생활을 위해 돈을 벌었고 처음 1~2년은 책 쓰는 재미에 미쳐 출간할 산문집을 집필했다. 그리고 간간히 <조금만 더 가까이> 이전부터 진행했던 시나리오를 발전시켰지만 좋은 길로 가지 않았다. 2011년 말에 만들고 싶은 장편 시나리오 초고를 썼다. 그 시나리오는 상업 영화로 개봉하고 싶은 욕심으로 썼지만 내가 보여준 투자사와 제작사는 상업 영화로 보지 않았다. 전작 <조금만 더 가까이>는 내가 많이 배우기도 한 작품이고 많은 시도가 있었던 영화이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많은 영화였고 상업 영화 시장에서 보는 관점으로는 애매한 이력이 되었다. 그래도 머지않아 관심을 가져주는 제작사를 만났고 지금 떠올려봐도 만족스러운 아름다운 캐스팅을 했다. 배우가 매우 매력 있었음에도 투자사는 내가 쓴 시나리오의 상업적인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저예산 영화로 예산의 기준치를 낮춰 제작에 들어가려 했지만, 제작 진행을 눈앞에 두고 제작사에서는 좋은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투자액이 낮은 것은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것이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시나리오의 개발이 필요한 것 같다는 의견을 주었다. 난 의견을 받아들였고 시나리오가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했다. 그동안 아름다운 캐스팅의 주인공들은 바빠졌고 많은 영화를 찍었다. 캐스팅은 옅어졌고 난 다시 캐스팅을 진행했다. 다시 만족스러운 캐스팅을 했고 (난 항상 캐스팅 운이 좋은 편이다) 얼마 후 제작사 대표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를 만나 한강 변을 산책하면서 꽤나 좋은 예산 규모의 투자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디어 출발선에 선 것이다. 오랜만에 내가 정말 원하는 영화의 시작, 그 출발선에 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메일로 감독 계약서가 와 있었다. 그리고 계약서를 검토하던 중 다시 투자가 난항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된 줄 알았던 투자가 내부의 큰 반대 입장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영화는 그렇게 3년간 두세 번 너울 치며 제작의 앞에서 썰물처럼 기회가 빠져나갔다. 덕분에 눈앞에 잡히는 기회를 믿지 않는 냉정함이 생겼다. 그 영화는 이후에 한 번 더 제작의 기회를 맞았으나 제작사가 개봉한 다른 영화가 흥행에 큰 실패를 하면서 다시 난항에 빠졌고 시나리오는 다시 오롯이 내 가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튼 그렇게 너울 치는 상업 영화(?)의 길 앞에서 위기감 때문이었는지, 틈만 나면 부지런히 다른 시나리오를 써 댔고 4일 만에 초고를 쓴 <최악의 하루>라는 영화의 시나리오 또한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전 영화가 투자의 벽에 부딪히고 나서 난 저예산으로 제작 가능한 <최악의 하루>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했고 제작사를 정하고 다양한 제작 지원 사업에 출품했다. 안타깝고 지겹게도 제작 지원 사업은 낙방이 이어졌다. 그리고 3억의 투자가 30억 투자보다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던 중 단막극 제작 지원 사업에 출품했던 것이 1차 서류 전형에서 통화했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드라마 작가와 피디들이 심사하는 면접이었고 그들은 드라마가 아닌 영화 시나리오라는 것에 대한 편견은 있었지만 나에 대한 편견은 없었다. 얼마 후 면접 심사를 통과했고 1억 정도의 지원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저예산 영화에 투자를 하고 싶다는 개인 투자자를 만났다. 어느 정도 배우 캐스팅만 안정되면 무리 없이 영화를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시나리오를 배우들에게 넣었고 연달아 좋은 캐스팅이 들어왔다. <최악의 하루>에는 주연급 일본 배우가 필요한데 무턱대고 질러본 캐스팅에서 좋은 소식이 왔다. 대어를 낚은 것이다. 일본 내에서 상당한 지명도가 있는 배우가 관심을 보였고 나는 그가 내 영화에 캐스팅된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획된 크랭크 인 몇 주 전에 캐스팅이 좌절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절이 중요한 영화임에도 계획된 시기에 영화를 들어갈 수 없겠다는 걱정이 되던 중 <한여름의 판타지아> 개봉 일정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와세 료를 만났다. 난 그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온화한 품성이 드러나는 얼굴과 낮은 목소리와 눈빛들이 좋았고 대어는 이미 내 관심 밖이었다.
남은 캐스팅도 그만큼의 드라마가 있었고 나에게 필요한 로케이션지가 있었지만 철옹성처럼 뚫리지 않던 것들을 마침내 모두 얻었다. 프리 프러덕션은 순리대로 흘러갔고 개인 투자사와 제작사 간 이견이 있었지만 영화 제작에는 차질이 없을 걸로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와 개인 투자사와 제작사 간 이견이 좁혀질 수 없다는 것을 크랭크 인 며칠 전에 알았다. 영화 투자치고는 소액인 1억 5천만 원 가량의 예산이었지만 우리 영화에는 컸다. 크랭크 인 이틀 전 난 제작사의 입장을 따랐고 투자사를 잃었고 내 전 재산을 털었다. 졸지에 내가 투자사가 되었다. 내 전 재산을 다 털어도 필요한 전체 예산을 채울 수는 없었지만 일단 프러덕션만 완성 짓는 것을 목표로 잡고 나머지 투자는 영화 촬영을 끝내고 알아보기로 했다.
영화 촬영은 시작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촬영 회차는 16회차였고 40~50회라는 일반적인 상업 영화 회차의 1/3 회차로 찍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들보다 3배 빠르게 찍겠다는 일념으로 영화를 찍었다. 계절은 도와줬고 배우들은 때때로 경이로운 연기력을 보여줬다. 난 계절과 배우들의 연기와 스태프들의 열정에 감사하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매우 행복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크랭크 업이 아쉬울 만큼 좋은 시간들이었고 스태프와 배우들이 빠져나간 시간, 그 많은 수고들을 편집했다. 편집본이 나왔고 더 이상 영화를 진행 시킬 예산의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투자를 찾았고 생각보다 쉽게 투자와 배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고마운 조력자들을 만나 무사히 영화를 완성 지었다. 세상의 평가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난 대략 만족스러운 나의 영화를 얻었다. 그리고 난 다음의 기회를 고민 중이다.
몇 년째 오전은 동네 스타벅스에서 시작했다. 노트북을 펼치고 계획하고 정리하고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글을 쓴다. 혼자 점심을 먹고 걷고 메모하고 책을 보고 메모하고 아이디어를 모은다. 또 어딘가 앉을만한 곳을 찾아 노트북을 펼친다. 매일 하나 이상의 시도와 실패가 있다. 내 안에서의 시도와 실패 혹은 선택되지 않았거나 거절당했거나 떨어졌다는 외부에서 오는 실패의 소식들을 듣는다. 내가 노력에 들이는 시간은 내 이야기를 쓰게 하지만 그만큼 내 앞에 놓인 벽들의 높이도 자란다. 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한 변화와 내가 모를 편견과 발치에 놓인 현실을 먹으며 벽들이 자란다. 매일은 큰 변화가 없는 듯하지만 거울 너머 흰머리를 보이게 하는 시간이 흐른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힘겹게 내가 손에 넣고 품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성공이나 성과로 불리는 것들은 되지 못한다. 수많은 실패의 무덤들을 지나 기회를 하나 얻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만들 기회, 또는 보여줄 기회를 귀하게 얻고는 그 기회를 품에 안고 잠이 든다. 다음날 눈을 떠도 그 기회가 남아있기를 바라고 그 기회로 하나의 시도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최악의 하루> 촬영현장(사진: 김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