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칠수와 만수
박광수, 1988
한국영화가 1970년대의 암흑기를 지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른 시기에 등장한 일련의 감독들을 가리켜 ‘코리안 뉴 웨이브’라고 부른다. 그 선두 주자는 박광수와 장선우이며, 1988년에 각각 <칠수와 만수>, <성공시대>로 데뷔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했으나, 국민 대다수의 기대와는 달리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의 당선으로 끝났다. 민주항쟁의 성공과 좌절 시기를 거치면서 등장한 ‘뉴 웨이브’는 이전 시대의 감독들과 달리 데뷔작부터 한국 현대사와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문제를 주요 소재로 다루었다.
<칠수와 만수>에서, 두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뿌리에는 ‘분단 문제’가 있다. 한국전쟁과 분단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 전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박광수는 <베를린 리포트>(1992),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에서도 한국전쟁과 분단의 문제를 다루었다.
<칠수와 만수>에서, 칠수의 아버지는 동두천에서 미군을 상대로 포주생활을 하다 무능력한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했다. 그의 누나는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성조기 무늬의 나시를 걸친 칠수의 꿈은 누나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가는 것이지만, 누나와는 연락조차 끊어진 상태다. 만수의 아버지는 비전향 장기수로서 거의 삼십 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 아버지는 가족의 바람과는 달리 사흘 동안의 특별가석방조차 거부한다. 만수는 해외에 나가 돈을 벌려고 했으나, 연좌제에 걸려 좌절한다. 동두천, 미군 부대, 양공주, 비전향 장기수 등은 한국전쟁과 분단이 낳은 후유증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민방위 훈련의 사이렌과 함께 피난 가듯 뛰어가는 사람들과 얼어붙은 광화문 네거리의 풍경은 분단국가의 초상이다.
술 마시는 아버지 앞에 앉는 칠수, 아버지가 갇힌 감옥의 높은 담장을 쳐다보는 만수, 결국 한국전쟁 세대인 그들의 아버지는 우파든 좌파든 관계없이 실패했다. 그리고 그 아들들은 아버지를 저주하면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칠장이로 근근이 살아간다. 칠수는 여대생 지나와 데이트하는데 성공하지만, 계급의 차이만 깨닫게 될 뿐이다. 만수는 갖가지 사투리를 구사하며 일거리를 얻으려고 애를 쓴다. 그들이 처한 남루한 현실은 비 오는 날 이인용 자전거를 타고 가다 미끄러지는 장면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강고한 현실의 벽 앞에서, 칠수는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허언증 환자가 되어가고, 만수는 세상의 변화를 비웃는 냉소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공장에서 노조활동을 하는 여동생이 ‘아버지가 정당한 재판을 받도록 해보자’고 할 때, 그는 ‘다 쓸데없다. 네가 그런다고 되는 줄 아냐’고 냉소한다. 그의 비관적인 태도에는 1987년 대통령 선거의 패배로 인한 진보진영의 좌절과 무력감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칠수와 만수의 열악한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 다음, 그들은 강남 한복판, 고속터미널 근처 빌딩에 설치된 광고판의 도색작업을 하게 된다. 작업을 마친 그들은 빌딩 옥상에 거의 재미 삼아 올라간다. 그들은 서로의 처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다 문득 아래를 향해 소리치며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밑에서는 들리지 않는 가운데, 군중들이 몰려들고 경찰이 출동한다. 밑바닥 계급의 두 사람이 높은 옥상에 올라갔을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내뱉게 된다. 그러나 메시지는 전해지지 않고, 노사문제로 인한 농성이나 자살로 오해를 사면서, 그들은 분노와 함께 심한 고립감을 느낀다.
‘칠수와 만수가 내려오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수는 지상에서 기동타격대가 올라오고 공중에서 헬리콥터가 맴돌 때, 문득 자신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피해의식에 시달리던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기다린다고 생각한다. 결국 만수는 자살을 선택하고, 칠수는 체포된다. 만수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칠수가 절망적인 눈빛으로 경찰차 밖을 쳐다보는 정지화면으로 끝난다. 이 장면을 비롯해서 이 영화에는 인물들이 갇혀있는 듯한 미장센이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러나 만수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분단이 지속되는 한 그들을 속박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칠수와 만수>는 검열이 심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더욱 의미 있는 데뷔작이다. 이 영화를 더욱 인상 깊은 데뷔작으로 만든 공로에는 박중훈의 연기, 유영길의 촬영, 김수철의 음악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