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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춘몽

유현목, 1965

[한국영화걸작선]춘몽 대표 이미지
수 초간 배우 박수정의 벗은 뒷모습 노출로 검열당하면서 외설과 검열 논란을 불러온 영화. 그러나 실은 포르노에 가까운 원작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을 감독이 전위적인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과 몽타주 기법의 활용이 두드러지는 유현목 감독의 <춘몽>(1965)은 보이기 이전에 들리는 영화였다. <춘몽>을 둘러싼 이야기는 영화에 대한 환상에 가까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작품을 찾아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작품을 보고 나서는 어쩐지 <춘몽>에 관한 전설들이 영화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과거 담론을 넘어 <춘몽>을 보이는 것으로 사유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치과에서 마취치료 중 잠에 빠진 남자(신성일)가 치료 중 기절한 다른 환자(박수정)와 치과의사(박암)가 등장하는 꿈을 꾼다는 내용의 <춘몽>은 꿈과 깨어나기라는 익숙한 서사구조를 지닌다. 영화는 크게 치과를 중심으로 한 현실과 남자(신성일)의 꿈속 공간으로 양분된다. 현실 공간(그리고 일부 꿈의 공간)에는 환자들의 상상 혹은 카메라의 상상처럼 보이는 환상 장면들이 인서트 된다. 대부분은 치과 진료기구가 내는 소음과 환자의 공포를 과장하는 장면들이다. 실제와 상상의 연이은 굉음 뒤에는 늘 소리가 멈춘 뒤의 침묵이 이어지는데, 이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의 기운이 굉음보다 어쩐지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침묵과 그 속에서 차츰 정신을 잃어가는 남자와 여자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침묵의 세계를 거친 뒤 도래한 꿈의 세계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예를 자유자재로 뽐내는 무대극의 세계다. 무대화된 세트장 속에서 다양한 출연진들이 벌이는 버라이어티한 소요는 어쩐지 미심쩍다. 이들은 자신이 거쳐 온 침묵, 혹은 여전히 어딘가에 잠재한 침묵을 부정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소요는 잘 짜인 안무, 그 이상을 보여주진 못한다. 가장된 꿈의 세계와 인물들 사이에서 현실의 세 남녀(남자, 여자, 치과의사)는 마치 꿈과 현실 사이에 놓인 듯 돌출된다. 현실에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여자, 마취에 빠져드는 남자, 이들을 통제하는 의사의 관계는, 여인을 통제하는 마술사, 마술사로부터 여자를 구하려는 남자, 이들 사이를 오가는 여자의 구도로 비슷하고도 다르게 반복된다. 

이들 중 여자는 두 개의 세계를 겹쳐보았을 때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현실에서의 부동성을 만회하려는 듯, 여자는 꿈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전체 서사의 맥락에서 여자는 마술사와 남자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물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여자의 움직임은 일견 수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오롯이 남은 것은 여자의 움직임과 이것이 보여주는 움직임에의 욕망이었다. 이 환영 같은 잔상은 여자의 움직임을 중심에 두고 영화를 다시 보도록 이끈다. 


꿈의 세계에서도 여자는 철저히 욕망의 대상이 되며 남자와 마술사는 다른 방식으로 여자를 소유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 사이를 오가는 여자의 움직임은 남자들의 욕망을 넘어선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자가 보여준 두 개의 움직임을 언급하려 한다. 여자가 남자와 함께 도망치던 중 탈진 상태에 이른다. 그녀는 결국 쓰러진 채 남자에게 의지하게 되고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구하려는 행위에서 비롯된 에로틱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에로틱한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덧붙여졌다 말하기에 여자의 움직임은 과도하며 어딘가 절박한 데가 있다. 여자의 움직임이 서사를 넘어 그 자체로 시선을 잡아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외설논란에 휘말린 결정적인 장면에서 마술사를 거부하는 여자의 제스처는 여자에 대한 마술사의 착취적 욕망을 위해 삽입됐다기에는 과도하다. 도망가는 과정에서 찢긴 옷에 겨우 몸을 가린 채 위로 탈출할 수도, 아래로 숨을 수도 없는 그녀의 움직임은 단지 마술사에 대한 거부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과 방향성을 상실한 출구 없음을 표현한다. 영화는 여자의 움직임을 반복적인 롱테이크로 보여주면서 과도한 움직임을 강조한다. 남자가 여자를 쏘아죽이는 꿈 장면의 결말은 여자가 움직임이 정지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녀가 끝까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자의 움직임은 서사적 원인과 목적을 벗어버리고 오직 사유대상으로 남겨진다. 이때의 움직임은 이만희의 <휴일>(1968) 속 마지막 장면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신성일)의 마지막 걸음, 레오스 카락스의 <나쁜 피>(1986)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안나(줄리엣 비노쉬)의 마지막 비상을 상기시킨다. 죽음을 벗어나려는 것도, 죽음을 향해가는 것도 아닌, 죽음을 온몸으로 품은 채 걷거나 내달리는 것 같은 움직임이 이들의 공유처다. 움직임에 어떤 이유를 덧붙이기 전에 그것을 바라보게 한 것. <춘몽>이 진정 전위적인 작품으로 기억되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여성 캐릭터의 신체를 통해 표현된, 목적을 벗어난 움직임의 고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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