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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러시안 소설

신연식, 2012

[한국영화걸작선]러시안 소설  대표 이미지

롱테이크의 화면, 반복되는 내레이션, 어느 시대인지를 알 수 없는 한적한 분위기. <러시안 소설>은 동시대 한국영화의 흐름에서 외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뿜어내는 시차는 영화를 만든 신연식 감독이 동시대와 다른 곳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이 시대의 유행과 다르기 때문이다. <피아노 레슨> <좋은 배우> <페어러브>를 거쳐 온 신연식 감독의 영화에는 장르적 관습을 구축하거나 자극적인 것을 내세우고자 하는 야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각본과 제작을 겸한 <동주>에서도 보여지 듯 그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에 대한 일관된 관심은 또렷하다. 신연식 감독은 예술가란 무엇인지, 예술가의 초상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해 왔다. 

 <러시안 소설>은 재능도 없어 보이는 소설가 지망생 신효의 이야기다. 그는 경미라는 잘 나가는 소설가와 연애를 해보기도 하고, 친구의 아버지이자 우현제를 세운 당대 최고의 소설가 김기진에게 인정받고자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김기진의 아들이자 친구인 성환은 신효를 도우며 작품과 삶에 대한 충고를 건넨다. 신효가 머무는 작가들을 위한 공간인 우현제에는 소설가 정석과 그의 딸인 가림이 머물고 있다. 이들도 느슨하게 신효에게 말을 건넨다. 또 한 명의 흥미로운 인물 중의 하나는 신효의 재능을 인정하고 도와주려고 애쓰는 재혜라는 여성이다. 한 남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헌신하는 그녀의 모습은 전작 <페어러브>의 남은(이하나)과도 슬쩍 겹쳐있다. 

한 단락에 걸친 <러시안 소설>의 길고 복잡한 인물들의 관계망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영화는 신효라는 지망생을 둘러싼 관계들을 건드린다. 그 가운데 또렷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소설가가 되고 싶은 신효의 열정이다. 과연 그는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정작 그가 어떤 작품을 쓰는지는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뭔가 에너지는 있지만 세련되지 않은 그의 습작에 대한 단상들이 흘러나온다.). 신효는 소설을 쓰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 열정은 재혜를 탄복시키고, 끝내 이상한 열정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동반 자살을 시도한 지점에서 <러시안 소설>은 시간의 번지점프를 감행한다. 27년 만에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중년의 신효도 어색하지만 화면의 톤과 분위기도 사뭇 달라져 있다. 마치 두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서로 다른 분위기의 영화를 겹쳐 놓으면서 신연식 감독은 고전적인 영화 이야기의 파괴를 감행한다. 더 이상 과거의 인물인 성환, 경미, 재혜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27년의 시간 속에서 깨어난 신효는 그가 흠모했던 김기진 작가 이상으로 최고의 소설가 반열에 올라와 있다. 이 간극은 예술가의 두 가지 유형을 생각하게 만든다. 전반부가 예술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면, 후반부는 최고의 예술가가 된 자의 무기력하고 황망한 행동들을 보여준다. 

이 간극을 통해서 신연식 감독은 예술가의 완성은 이처럼 우연적이고, 비약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보여준다. 아이러니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간극은 예술의 비약, 예술가의 도약을 상징적으로 압축해 버린다. 그 시간 동안 잠들어있던 신효는 깨어난 후의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의 기억 속에서는 분명 작품들을 불태워 버렸다. 그렇다면, 자신의 작품을 출간하고, 유명세를 만들어 낸 이는 누구일까? 성환일까? 재혜일까? 아니면 경미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일종의 맥거핀(미끼)일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시간이 무엇인지를 간극을 통해서 드러내는 데 있다. <러시안 소설>은 예술가의 시작과 끝만을 보여줌으로써 작품을 완성시키는 신화의 과정을 제거해 버린다.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 영화로서 예술가의 신화화 과정을 제거해 버린다.

도대체 신효의 작품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반향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그것은 일정하게 현실에서 발생하는 예술의 신화를 보여준다. 앤디 워홀의 고흐의 작품이든 하나의 예술이 반향을 일으켰다는 사건 그 자체가 예술을 완성한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 사건들을 따라 고민하는 작가의 초상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예술가를 둘러싼 신화화 과정 대신 신화화 되는 순간들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알맹이만 제거한 채 예술가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들을 건드리는 <러시안 소설>은 일종의 예술 혹은 예술가에 대한 종합선물세트인 셈이다.

신연식 감독은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예술가의 신화화’에 대한 이야기를 선사한다. <조류인간>을 거쳐 <동주>로 이어지는 예술가의 이야기들은 신효의 비어있는 시간을 채우는 작품들이다(<조류인간>이라는 제목은 <러시안 소설>에 언급되기도 한다). 윤동주 시인의 작품은 지금은 아주 유명했지만, 정작 그는 당대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시인 중 하나였다. 사후에 발간된 이 시집이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되었는가를 촘촘히 보여주면서 <러시안 소설>과는 다른 예술가의 시간을 선택한다. 

그중에는 윤동주처럼 이미 알려진 예술가의 리스트도 있고, <조류인간>처럼 신연식 감독이 창조해 낸 가상의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있다. 두 방향 다 일정하게 흥미롭다. <러시안 소설>의 무명씨들을 생각해 보자. 무명의 예술가 신효를 사랑한 재혜, 예술가가 선망하고 탐미하는 경미, 예술가 친구를 슬쩍 도와주는 성환 등의 캐릭터가 또 다른 예술가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신연식 감독이 알게 모르게 아이돌이나 새로운 배우들을 발굴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선택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만큼이나 그는 대중문화나 현실에서 예술가의 삶을 고민하는 인간과 배우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다.

사실 예술을 둘러싼 욕망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한 것이다. 한 천재적 개인이 아니라 천재적 개인을 발굴하고 북돋워 주는 예술가의 친구들이 있기에 예술을 비로소 꽃을 피운다. 신연식 감독의 영화가 예술가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이 지점에서다. <좋은 배우>에서 연극 무대에 올라와 있는 이들이 좋은 배우가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도, 결국 나 혹은 네가 어떤 예술가 혹은 예술가의 친구가 될 수 있을지를 탐문하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다. 동주 곁에 몽규가 있었던 것처럼, 몽규 곁에는 동주가 있다. 그들은 멀리 있는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일상의 예술가들, 고민하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의 초상이다. 신연식 감독의 영화는 그러한 인간상을 그려내는 것에서 항상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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