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무릎과 무릎사이
이장호, 1984
한국영화걸작선과 <무릎과 무릎사이>(이장호, 1984)의 만남. 만약 이 ‘기이한 조합’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아마도 당신은 성적 판타지가 만개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무릎과 무릎사이>를 본 관객일 가능성이 높다. 때로 어떤 영화는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을 뿌리 삼아 밑도 끝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다가, 어느새 ‘상상의 영화’가 되어 원작을 압도하곤 한다. <무릎과 무릎사이>가 바로 그런 영화다. (관람 당시 중고생이었던) 한 남자의 인생을 관람 이전과 이후로 갈라놓은 <나인 하프 위크>(애드리안 라인, 1986)에 필적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한국영화. 그것이 <무릎과 무릎사이>다.
강렬한, 너무나도 강렬한 이미지
<무릎과 무릎사이>는 3S(섹스, 스포츠, 스크린)로 대변되는 1980년대를 넘어 지금까지 등장한 그 어떤 한국 영화보다 선정적인 제목을 지닌다. 특히 그 주인공인 이보희가 의자에 앉아 무릎을 치켜세운 모습을 전면에 노출한 포스터는 이 작품에 농밀한 느낌을 더한다. <무릎과 무릎사이>의 제목이나 포스터의 관능에 견줄만한 영화는 <올 레이디 두 잇>(틴토 브라스, 1994)이 유일하다. 어쨌든, <무릎과 무릎사이>는 제목과 포스터에서 남성 관객의 에로틱한 욕망을 낚아채려 했고, 그해 한국영화 흥행 2위라는 성적은 이 전략이 꽤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장호는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1980년대 중반 충무로를 대표하는 흥행사로 재도약한다.
<무릎과 무릎사이>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경멸할 만한 것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실제로 강간에서 쾌감을 얻는 여성 주인공 자영(이보희)의 캐릭터나, 여성의 신체를 파편화하여 관음증적 쾌락의 도구로 삼는 연출, 타락한 여성을 남성이 용서하고 구원하는 도식적 드라마 등, <무릎과 무릎사이>는 여성 비하적인 설정과 장면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것이 <무릎과 무릎사이>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가로막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무릎과 무릎사이>는 무관심 속에 버려두기에는 텍스트의 ‘비균질성’이나, 남성의 가학적인 성적 판타지를 안전하게 유지시켜주는 상업적으로 영리한(?) 스토리텔링,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 관객의 기억에 평생 달라붙을 만한 강렬한 쇼트의 힘만큼은 한국영화 중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무릎과 무릎사이>에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몇몇 장면이 있다.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자영에게 그녀에 대한 소유욕으로 가득한 동창(임성민)이 찾아온다. 동창은 무릎을 중심으로 자영의 신체를 애무한다. 이장호는 동창의 행동과 자영의 리액션을 과감하게 이어 붙인다. 동창의 손을 따라서 자영의 몸을 부유하는 카메라. 자영의 입술. 이 모든 것의 빅 클로즈업. 그리고 그 반복. <무릎과 무릎사이>는 관객들에게 클로즈업이 사물의 확대라는 것, 우리에게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영화적 기법이라는 것을 온전하게 가르쳐준 영화다. 이 장면이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기억에서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물론 <무릎과 무릎사이>의 압권은 비 오는 밤 벌이는 동창과 자영의 정사 장면일 것이다. 이장호는 해변 장면보다 이 장면에서 더욱 과감해진다. 폭우, 천둥, 번개와 두 사람의 정사가 앙상블을 이루면서 1980년대 한국 에로영화 중 가장 압도적인 ‘야한 이미지’를 완성한다. 어린 시절 이후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이가 있다면, 이 장면에서 의외로 노출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장면은 우리 세대에게 가장 ‘야한’ 장면으로 착시적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것이 쇼트의 힘이고, 이미지의 강렬함이다. 이장호는 신체의 노출이 아니라, 음향이 가미된 쇼트의 리드미컬한 구성만으로 그것을 성취한다.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
<무릎과 무릎사이>에는 두 무릎 사이를 넘어서는 또 다른 ‘사이’가 존재한다. 자영의 동생은 마이클 잭슨에 빠져있고, 이는 전통을 추구하는 자영의 연인 조빈(안성기)와 대조를 이룬다. 또한 억압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순결을 강요하는 어머니와 자영을 성추행하는 서양인 선생의 대립이 있다. 실제로 자영이 서양인 선생이 성추행했던 무릎에 페티시즘적 쾌락을 갖게 된 것은 억압적인 어머니에게 반항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자영은 한국 사회가 전통과 서구화로 찢긴 지점, 바로 그 ‘사이’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달리 말해, 그녀의 페티시즘적 쾌락은 전통과 서구화의 충돌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혼란의 병적 징후인 것이다. 이장호가 전통적 판소리와 클래식 연주의 교차 편집 등의 장면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릎과 무릎사이>는 사회적 문제 제기를 위해 여성의 신체를 경유한 것일까, 아니면 여성의 신체를 탐닉하기 위한 알리바이로서 사회적 문제의식을 끌어들인 것일까? 어쩌면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이 작품을 두 질문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당시에 이장호는 ‘내 영화의 겉포장은 섹스, 내용물은 정치’라고 공공연히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영화에 남은 것은 내용이 아니라 겉포장이다. 한마디로,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