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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이층의 악당

손재곤, 2010

[한국영화걸작선]이층의 악당  대표 이미지

“한국 남자들은 나이 처먹어가지고 아저씨 되면 아무한테나 조언하고 충고하고 그래도 되는 자격증 같은 게 국가에서 발급되나 봐” - 극 중 연주의 대사

<이층의 악당>은 아마 한국 영화사상 가장 이상한 엔딩을 가지고 있는 영화 중 한 편일 것이다. 골동품 밀매꾼 창인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수십억을 호가하는 청화 다기는 모녀의 차지가 되었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는데 창인은 다시 모녀의 집에 숨어든다. 그렇다고 여기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창인은 불면증을 호소하며 모녀의 호화로운 아파트 거실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렇다고 속편을 예고하는 열린 결말 같지도 않은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은 <이층의 악당>이 장르 영화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장르의 규칙으로 봉합될 수 없는 이물감을 남기는 영화라는 점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핵심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마치 봉준호 감독이 <괴물>과 <살인의 추억>에서 장르의 깃발을 흔들어대며 관객을 불러 모았지만 현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은 <살인의 추억>과 같은 시기에 도착한 장준환 감독의 괴작 <지구를 지켜라>가 외계인과 지구에 관한 SF 영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길들여져 있는 폭력적인 권력에 관한 고발의 영화였던 것처럼, <이층의 악당>은 장르 자체가 일종의 맥거핀이 되는 영화이다. 다만 앞선 세 편의 영화들이 끝까지 장르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픽션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단지 풍자와 은유의 효과를 적절히 이용하는 반면, <이층의 악당>은 수시로 장르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캐릭터들이 장르의 효과를 매 순간 잠식하고 있다. 

영화마다 그 영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가장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면, <이층의 악당>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극 중반부 연주가 창인과 술집에서 만나 신세 한탄을 하다가 자신의 이야기에 자꾸만 끼어드는 창인을 향해 날리는 촌철살인의 한 마디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횡행하는 맨스플레인에 대한 따끔한 충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대사는 영화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와는 그다지 크게 상관없는, 한국 사회의 어떤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 전반부에 걸쳐 있는 이러한 신경질적인 유머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유머 코드 이상의, 손재곤 감독의 세계관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층의 악당>에서 인물들의 대사, 더 나아가서는 캐릭터의 삶을 드러내는 장치들은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단순히 사건의 전개에 따라 움직이는 각자의 역할 분담 이상의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관객을 장르의 규칙 아래 몰입시키지 않고 캐릭터의 내면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캐릭터들의 내면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다. 연주의 헤어날 길 없는 불면증, 연주의 딸 성아의 외모 콤플렉스는 그녀들을 향한 주변인들의,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끊임없는 조롱과 감시의 시선과 연관되어 있다. 아직은 젊은 나이에 사춘기 딸을 둔 과부가 된 연주의 우울증을 가중시키는 것은 매번 감시의 시선을 보내고 참견을 마다치 않는 이웃집 여인의 존재, 그리고 치료받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에게 은연중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의사이다. 성아 또한 학교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몰카로 찍는 급우들, 그리고 인터넷에 올라온 악성 댓글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외모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들이 드러내는 것은 유독 다른 사람의 허물에 관심을 보이고 이에 집착하며 조롱을 일삼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다. 

그렇다면 창인의 존재는 어떠한가. 창인은 한국 사회의 남성들이 갖고 있는 이중성을 그대로 체화한 인물이다. 그는 젠틀하고 로맨틱한 남자를 연기하는 순간에도 연주 말대로 거의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항상 충고하고 지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연주의 불면증이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다며 아침에 동네 한 바퀴를 뛰면 불면증 따위는 싹 없어질 거라고 말하는 창인은, 성아에게도 짐짓 멋진 아저씨 흉내를 낸다(그러나 창인의 그러한 태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듣지 않는 곳에서 그는 그들에 대한 경멸감을 혼잣말로 끊임없이 쏟아낸다. 그가 숨겨진 목적, 즉 청화 다기를 찾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 모녀에게 접근한다는 영화의 플롯은 그의 이중성을 설명해주지만, 한편으로 거기에는 은연 중 스스로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일반적인 한국 남성들의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묻어있다. 

그리고 손재곤 감독은 창인의 끊임없는 실패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그의 허세를 조롱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 후반부 그가 연주의 집에 있는 골동품 창고에 들어갔다가 갇혀버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필요 이상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창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태도가 숨어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주는 숨겨진 의도를 지닌 창인을 의도치 않게 끊임없이 괴롭히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위선을 폭로한다. 그리고 로맨틱한 작가 애인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던 창인은 자신의 가면이 벗겨지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감당할 뿐이다. 영화 후반부 그의 수상쩍은 정체를 눈치챈 연주는 그의 나이를 들먹이고, 우리 나이에 로맨스가 가당키나 하냐며 섹스나 하자고 말한다. 연주의 가장 큰 약점처럼 보였던 우울증이 아이러니하게도 창인의 이중성을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세간의 기준, 그리고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 지나치게 가혹한 사회의 위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존재한다. 손재곤의 영화를 보며 혹자는 우디 앨런의 영화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층의 악당>에는 모든 인물과 거리를 두는 태도가 있다. 멀찍이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지, 그래서 때로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에 대해 우디 앨런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설파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롱의 시선만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연민의 시선 또한 묻어있다. <이층의 악당> 또한 의도적인 거리 두기를 통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을 조금씩 희화화하지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위선과 불안감을 캐릭터와 공유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우디 앨런의 영화와 맞닿는 어떤 겸허함이 숨어있다. 

이제, 다시 한 번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창인은 요즘 잠을 도통 잘 수가 없다며 연주에게 불면증은 다 나았느냐 묻고, 그녀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울먹이며 뇌까린다. “씨, 자기만 괜찮아지고...” 아침 운동이면 불면증 따위는 날려버릴 수 있다며 설교를 늘어놓던 창인은 이제 정확히 연주와 유사한 우울증 환자가 되었고, 그런 창인의 머리를 안쓰럽게 쓰다듬으며 연주는 말한다. “나도 알아요, 그런 기분... 나도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또다시 그렇게 될지 몰라요..” 숨겨진 보물을 찾는 코미디 스릴러 장르에는 걸맞지 않은 이 기이한 엔딩은 끊임없이 장르적 속성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환기시키는 캐릭터들을 등장시켰던 이 영화가 향하는 목적지가, 결국 픽션을 통해 얻어지는 인간사에 대한 진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 아닌,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은, 끝이되 결코 끝일 수 없는 이 이야기의 묘한 결말을 뒷받침해 준다.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이 결국 복잡다단한 현실을 환기하게 만든다는 것, 환상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은 예술이 갖는 가장 핵심적인 효과이기도 하다. <이층의 악당>은 완벽하게 허구의 세계 속으로 몰입할 수 없는 캐릭터들을 통해 이야기 속에 숨겨진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21세기 한국 영화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유의미한 작품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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