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0시
이만희, 1972
<0시>를 필름으로 처음 본 것은 2001년 영상자료원이었다. <0시> 외에도 전쟁의 비극을 다룬 < YMS 504의 수병 >(1963), 범죄 스릴러 <원점>(1967) 같은 이만희 감독의 영화들을 함께 보았다. 당시만 해도 이만희 감독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이라서 ‘영화 천재’라는 문구가 아니라 ‘불운’이나 ‘미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개인적으로는 매주 영상자료원에서 한국영화를 관람하던 시기였고, 그 무렵에 봤던 작품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이 <0시>였다. 이 영화는 내게 작은 발견이나 마찬가지였다. 부활절 달걀처럼 소소한 기쁨을 주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이만희의 숨겨진 보물이라고 평가하거나 걸작이라고 우길 생각은 전혀 없다. 이미 이만희 감독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마의 계단>(1964) <검은 머리>(1964) <귀로>(1967) 등을 보고 난 이후, 이 이상한 영화에 더 관심이 생긴 경우였다. 이만희의 독특한 영화 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그의 1970년대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때로는 위대한 걸작보다 의외의 범작에 마음을 뺏기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이 영화가 지닌 묘한 매력에 빠져든 것은 분명했다.
이만희 감독의 필모그래피 차원에서 보면, <0시>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와 <삼포가는 길>(1975)의 따뜻한 정서와 휴머니즘을 미리 예견하는 후기작이다.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기라는 것을 고려하면 ‘0시’는 금지된 시간을 의미하고, 다분히 사회상을 반영한 범죄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의 부제 ‘수사대장’에서 알 수 있듯이 남대문 경찰서 소속 330수사대의 장중한 반장(허장강)이 주인공이다. 그는 현모양처인 아내(윤정희)와 말썽꾸러기 아들 규석(이승현)을 둔 가장이다. 보수적이고 무뚝뚝한 남편이지만 외강내유의 인간미가 돋보이는 경찰 캐릭터다. 서울역 주변 염천교 옆 허름한 빌딩 옥상에서 살면서도 퇴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피곤해!”, “고독하군”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직업병(만성 위염)에 시달리는 직장인이기도 하다. 그가 법의 집행과 인정 사이에서 갈등하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다분히 1971년 3월에 시작한 MBC 드라마 <수사반장>의 반장(최불암)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주요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오토바이 도난 사건의 범인을 체포하는 것과 장 반장에게 원한을 품고 아들 규석을 납치한 민수(문오장)를 찾는 것이다. 도난 사건과 아동 유괴라는 범죄가 핵심 테마지만, <원점>(1967)에서 제시한 필름 누아르나 범죄 스릴러 형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런 식의 표현이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0시>는 스릴 없는 느슨한 범죄극이며 긴장이나 공포가 부재한 스릴러다. <검은 머리> <암살자>(1969) 같은 어둠의 세계를 기대한다면 보기 좋게 배반을 당할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는 희망을 꽃피운다. 범죄를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추적하고 있지만, 그 범죄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관용을 베풀고 있다. 오토바이를 훔친 도식이나 아이를 유괴한 민수는 곧 회개하고, 사회는 동시에 이들을 용서함으로써 훈훈한 결말을 추구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해피 엔딩일 수밖에 없다. 결말보다는 오히려 캐릭터의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식의 연인이자 인돌의 가출한 누이(김창숙)나 가족이 파괴된 민수는 이만희 영화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상이다. 삶의 터전이나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은 사회에 편입할 수 없는 타자로 머물고 있다. 즉 근대화된 도시의 부적응자들이다. 영화는 처벌보다는 이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순수함(허장강의 입을 빌려 ‘순진’이라고 표현)을 엿본다. 떠돌이 부초들의 삶을 바라보는 이만희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