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내시
이두용,1986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두용 감독의 팬이었다. 어쩌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이를테면 프로야구 중계가 우천으로 취소된 토요일 오후에 땜빵용으로 TV에서 방영된 한국영화들 가운데 이두용의 영화가 있었다. <오빠가 있다>와 같은 정체가 괴이한 액션 멜로영화도 내 마음을 홀리곤 했다. 지리멸렬한 스토리였으나 액션이 시작되면 거두절미 박력 있게 이어지는 화면 리듬이 경이적이었다. 역시 TV에서 본 <최후의 증인>과 같은 영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극장에서 본 <피막>이나 <물레야 물레야>도 압권이었다. 나는 이두용의 신작을 1980년대 내내 기다렸다. 최재성, 조용원이 주연한 <고속도로>와 강수연이 주연한 <업>을 보고 실망했다. 한 감독의 경력이 그렇게 허무하게 고꾸라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내시>는 나를 감동시킨 마지막 이두용 영화였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이후 난 2번관 3번관을 쫓아다니며 이 영화를 일곱 번 관람했다. 거듭 볼 때마다 새로운 게 눈에 들어왔고 내 생애 처음 긴 평론을 쓴 영화도 이 영화였다. 신상옥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내시>는 사랑하는 여자를 되찾기 위해 내시 신분으로 위장해 궁으로 들어간 한 양반 출신 사내 서정호의 이야기다. 그와 정분을 나눴던 여자 자옥은 세도가인 아버지의 정략에 따라 궁에 들어가 후궁으로 간택된 후 이제 함께 얘기도 할 수 없는 신분이 되어 있다. 비련의 러브스토리가 핵심이지만 영화는 이것보다 곁가지 플롯이 더 흥미를 끄는 형태로 전개된다. 남궁원이 연기하는 내시감은 서정호와 자옥을 연기하는 안성기, 이미숙 남녀 주연배우 못지않게 플롯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인데 그가 봉사하는 왕실권력의 비정함과 타락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서정호와 자옥 두 남녀 주인공은 종종 플롯의 흐름에서 사라진다. 그런데도 아무 지장이 없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한 궁녀가 임신하자 궁궐이 발칵 뒤집히고 내시감은 성 기능이 되살아난 내시를 찾아내기 위해 모든 내시들을 집합시켜 하의를 벗기고 검사를 한다. 관객은 이 상황에서 안성기가 연기하는 주인공 서정호의 정체가 혹 밝혀지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낀다. 내시들의 하체 검사가 끝나갈 무렵 서정호와 다른 한 명의 내시가 다른 곳에서 붙잡혀 끌려 나온다. 그 두 내시는 검사를 받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데 강제로 서정호와 함께 끌려온 내시의 바지를 벗긴 어의가 그의 되살아난 성기를 확인한다. 호위 내시감이 가차 없이 그의 몸을 칼로 내려친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화면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주인공인 서정호의 반응화면을 잡기 마련이다. 안성기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고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의 서스펜스는 서정호의 정체가 발각되느냐 여부에 있었다. 서정호의 반응화면은 나오지 않는다. 가차 없이 이두용은 내시들이 하의를 추어 입는 멀리서 롱 숏으로 잡으며 이 장면을 끝낸다. 느닷없이 종결되는 그 호흡도 굉장하거니와 주인공의 존재를 잊은 듯 무심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이 장면 연출의 초점은 내시감이 봉사하는 왕실권력의 잔인함에 주어진다. 뼈를 깔끔하게 발라낸 생선살을 먹는 것과 같은 간편하고 유연한 커트감각의 맛이 이 장면에 있었다. <뽕>이나 <물레야 물레야>에서도 그랬지만 이두용은 줌렌즈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공간을 신축적으로 다룬다. 왕 앞에서 궁녀들이 공연을 하는 장면에서 궁녀들의 무리 가운데 유독 미모가 돋보이는 자옥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한 화면이 쑥 빠지면 부채춤을 추는 다른 궁녀들이 둥그런 원을 그리며 있는 것이 보이고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쑥 들어가면 또 다른 궁녀들의 무리가 잡히는 식이다. 번거롭게 달리나 크레인을 쓰지 않고도 카메라가 능란하게 돌아다닌다. 카메라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는 이야기의 운반수단으로 겸손하게 숨어서 화면에 박력과 긴장을 불어넣는다. 텅 빈 화면에 누군가의 발이 슥 들어오고 그가 멀어져 갈 때까지 죽 지켜보는 것과 같은 극적인 앵글도 곧잘 나오지만 전체적인 화면들의 균형감은 잘 맞는다.
겨울공화국의 시대에 이 영화는 궁궐 내부에서 벌어지는 추문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담았다. 영화의 말미, 동료의 죽음을 본 내시감은 칼을 들고 싸움에 나서며 감옥에 갇힌 서정호를 구해주고 도망치라고 충고한다. 서정호는 말을 듣지 않는다. 두 사람은 몰려드는 내시들과 병사들을 벤다. 크고 육중한 덩치를 지닌 내시감 역할의 남궁원이 “물러들 가라. 아니면 내시라도 벨테다”고 손을 휘젓고 몸을 앞으로 내디디면 상대편 병사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난다.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서 곧잘 과장되는 움직임의 상응과 대비가 이 영화에서도 우람하게 이뤄진다. 내시감과 서정호가 싸울 때 왕과 자옥은 왕의 침실에서 정사를 나눈다. 격렬한 크로스커팅으로 성과 폭력이 클라이맥스에 전시된다. 영화는 곳곳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새벽 궁궐의 롱 숏으로 끝난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 이두용이 보여준 박력의 스타일은 한국영화사에서 유일무이하다. <내시>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증명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