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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앨리스

얀 슈반끄마에르, 1988

[초이스]앨리스 대표 이미지

얼마 전 서울에서 체코의 애니메이션 감독 얀 슈반크마예르의 회고전이 열렸다. 조촐한 규모였지만 한국에서도 이 감독의 인지도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귀중한 회고전이었다. 체코에서 태어난 얀 슈반크마예르는 어린 시절부터 체코 전통 인형극에 몸을 담았으며, 초기 경력 역시 인형극 연출가로 시작했다. 그랬던 그는 1964년 첫 단편 <마지막 속임수>를 만들면서 애니메이션으로 영역을 옮겨가게 된다. 이후 체코 초현실주의와 접촉하게 되고, 슈반크마예르는 결국 노선을 변경해 초현실주의를 기조로 삼기 시작했다. 공산당 독재의 엄격한 검열 아래에서도 몇 개의 단편을 만들며 경력을 쌓던 슈반크마예르는, 1980년 <대화의 가능성>이라는 단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88년 첫 장편 <앨리스 Neco z Alenky>을 찍게 되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얀 슈반크마예르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슈반크마예르는 단편을 만들던 시절 이미 루이스 캐럴의 넌센스 시 ‘재버워키’를 영화화하면서 루이스 캐럴의 세계에 관심이 있다는 걸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처럼 앨리스의 영화화는 슈반크마예르의 평생 프로젝트 중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슈반크마예르의 또 다른 평생 프로젝트는 ‘파우스트’다. 이것도 1994년 영화화되었다.) 슈반크마예르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앨리스의 각색물들이 원작을 동화로 해석하는 행태가 못마땅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이미 디즈니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거쳐 간 이 동화를 슈반크마예르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특유의 환상성과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유창하게 쏟아지는 작가의 필력, 그리고 작품에서 풍기는 독특한 광기로 많은 창작자들이 재구성하고 해체하길 즐겼던 텍스트다. 주목할 만한 예로는 2000년에 출시된 미국 현대 고딕 문화와 만화적 상상력이 접목된 게임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가 있다. 아메리칸 맥기는 앨리스의 등장인물들을 마구잡이로 해체해 캐롤이 가지고 있던 긍정적이고 순진무구한 에너지를 싹 빼고 앨리스를 고딕 서브컬처와 그랑 기뇰적인 고어로 점철된 심리 호러로 재구성했다. 그에 비해 슈반크마예르의 <앨리스> 역시 각색이 이뤄지긴 했지만, 대체로 루이스 캐럴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과 서사, 캐릭터에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앨리스>는 맥기의 앨리스와 다른 방식으로 이상하다. 도입부에서 슈반크마예르는 앨리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당신은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아마도”. 이 “아마도” 야말로 <앨리스>를 이상함으로 인도하는 마법의 한 마디다. 우선 슈반크마예르가 기용해 앨리스를 연기한 아역 배우 크리스티나 코흐토바는 심술?을 정도로 원작 삽화가인 존 태니얼이나 디즈니가 정립한 앨리스 상에서 도망가고 있다. 원작과 상이한 비주얼도 그렇지만 이 앨리스는 대체로 위축되어 있으며,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을 향한 반응도 어딘가 소극적이다.

슈반크마예르가 만들어내는 이상한 나라 역시 앨리스만큼이나 원작에서 멀리 있다.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가다가 이상한 나라로 떨어지는 시퀀스는 슈반크마예르의 재해석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도 이 시퀀스를 보는 순간 루이스 캐럴의 원작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잠시 믿지 못할 것이다. 박제된 토끼는 진열대 유리를 깨트리고 발에 박힌 못을 뺀 뒤 황무지를 달려가 책상 서랍으로 사라지며, 앨리스는 토끼가 들어간 서랍 속에 들어갔다가 컴퍼스를 비롯한 문구류로 깔린 터널을 헤쳐 지나간다. 이 시퀀스는 전원적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먼지와 녹이 슬어 있는 황폐함으로 가득하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면서 <앨리스>의 이상함은 본색을 드러낸다. 슈반크마예르가 만든 이상한 나라는 화사하기는커녕 텁텁한 색감과 조명으로 이뤄진 폐쇄적인 공간이다. 과격한 프로덕션 디자인도 그렇지만 이 나라의 주민들은 한술 더 뜬다. 디자인부터 그들은 캐럴의 유쾌한 유머에 봉사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원전에 쓰여 있던 행동을 생기 없게 반복한다. 여기다 갑작스러운 음향 연출, 기괴한 소도구, 체코 인형극의 전통을 스톱 모션으로 옮겨 놓은 애니메이팅도 이들의 비인간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인간인 앨리스 역시 그런 애니메이팅 속에서 종종 길을 잃곤 한다. 앨리스가 축소되어 인형이 되는 시퀀스가 원작과 달리 무시무시하게 다가온다면, 그 생기 없는 애니메이팅에 감염될 것만 같은 공포 때문일 것이다. <재버워키>에서 보였던 단초가 <앨리스>에서 본격화된 셈이다.

<앨리스>의 세계는 기계적인 ‘음울함’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이 음울함은 영국에서 상상할 법한 질감의 음울함이 아니다. 오히려 변방의 유폐된 정서에 가깝다. 이 이상한 나라를 언급할 때 체코가 낳은 위대한 작가들인 프란츠 카프카나 카렐 차페크가 언급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슈반크마예르는 <앨리스>를 만들면서 원전을 자신이 살고 있는 체코로 옮겨 놓은 뒤 재해석하고 있다. 이 재해석은 마리오네트처럼 체코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며, 유럽에서도 다소 변방인 체코 사회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결과는 신선하다. 슈반크마예르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광기를 동유럽/체코 문화의 전통에서 재해석하면서, 그간 <앨리스>를 각색한 영미권 창작자들과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앨리스>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하나는, 대부분의 서사 전개가 앨리스의 독백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다. 이 애니에서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은 대사가 없다. 정확히 말해서, 말하는 장면에서도 입만 뻐끔거릴 뿐이다. 대신 앨리스가 독백을 통해 그들의 생각이라든가 대사를 대신 전달해준다. 그런데 슈반크마예르는 이 독백을 화면밖에 배치하지 않고 독백을 읊는 앨리스의 입술을 확대해 찍은 뒤 중간중간에 삽입하고 있다. 슈반크마예르의 다른 작품들에서 입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장치였다면 (단편 <자연의 역사> <대화의 가능성>, 장편 <쾌락의 공모자들>이 대표적이다.) <앨리스>에서는 조금 다르게 앨리스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에서 ‘애니메이팅’되지 않는 인물은 앨리스뿐이기 때문에 독백을 읊는 입술 샷들은 영화 전반을 차지하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과 충돌하게 된다. 독백 내용 역시 (원작의 서술을 차용한 거겠지만) 앨리스 자신의 생각마저 3인칭화해서 들려주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뤄져 있다. 요컨대 말을 할 때도 자기 목소리 없이 뻐끔거릴 뿐인 스톱 모션 인형들과,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 아예 전지적 시점의 내용까지 말하는 앨리스 사이에서 어떤 긴장 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이런 대립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다만 영화 속 ‘이상한 나라’가 체코의 문화적 전통에 기반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슈반크마예르 본인의 의도는, 자국에 대한 비평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슈반크마예르는 자신의 작품들은 ‘정치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앨리스>는 사람들이 떠올릴 법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루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하지만 발표된 지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많은 이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그 매력은 대체 무엇일까? 여기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앨리스>의 원제 < Neco z Alenky >는 “앨리스의 무언가”라는 뜻이다 슈반크마예르는 타국의 고전 문학의 충실한 각색물을 만드는 대신, ‘무언가’를 끄집어내 새로운 걸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그 ‘무언가’는 체코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개성이기도 하고, 원전이 가지고 있던 다른 측면이기도 하며, 슈반크마예르만이 가능한 초현실적인 상상력이기도 하다. 이 ‘무언가’의 위력은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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