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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정지영, 1982

[한국영화걸작선]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대표 이미지

1980년 부정의 하게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 정권은 여러 가지 유화책을 시도한다. 그중 컬러TV 방송과 통금 해제는 1980년대 한국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통금 해제의 해방감을 틈타 심야 영화 상영은 폭발적인 흥행으로 이어졌다. 1982년 3월 <애마부인>(정인엽)을 보기 위해 20-30대 젊은 커플들이 줄을 이었고, 장기 침체에 빠져있던 한국영화계는 탈출구를 에로영화에서 찾았다.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는 <애마부인> 신드롬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1983년 한국영화 흥행 6위에 올랐다. 

이 영화는 신인감독의 데뷔작에다 아직 한국영화에서는 생소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영화이며, 주연으로서의 존재감을 미처 입증하지 못한 두 여배우의 출연은 분명 위험요소였을 것이다. 1970년대 유신시대의 혹독한 검열로 인해 난자당한 한국영화는 점차 관객의 외면을 받았고, 이는 1980년대 초반까지 신인감독의 등장을 보기 힘들었던 이유였다. 

당시 에로영화의 성행을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의 결과로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애마부인>은 꽉 막힌 한국영화계 현실에 숨 쉴 틈을 만들어주었고, 에로영화는 경제 호황 및 부동산 열풍을 통해 중산층 의식을 확고하게 다지게 된 관객에게는 화려한 도시영화로 받아들여졌다.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는 이전의 여느 에로영화보다 더 에로틱한 데다, 스릴러, 미스터리, 호러의 장르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훗날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이 된 정지영 감독의, 조금은 예상을 비껴가는 데뷔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필자는 너무도 매혹적이었지만 너무도 비극적인 삶을 마감해야했던 자매 배우 오수미와 윤영실의 영화로 기억한다. 이국적인 미모로 등장부터 화려했던 오수미가 스캔들로 영화계에서 거의 퇴출되다시피 했다가 재기하게 된 작품이고, 최정상급 패션모델이었던 윤영실이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내건 주연작이었다. 상대 남자배우는 70년대 남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서 남성적 매력을 뽐내던 신일룡이었다. 세 명의 개성파 배우들의 존재감이 스크린을 압도한다. 

 정지영 감독은 히치콕의 <싸이코>를 좋아하다가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히치콕 류의 미스터리 스릴러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했다. 패션 디자이너인 아내(오수미) 덕에 무위도식하는 상류층 남자(신일룡)가 아내의 후배이자 자신의 내연녀인 패션모델(윤영실)과 짜고, 아내를 죽인 후 재산을 가로채려고 한다. 하지만 죽었다고 생각한 아내가 전화와 편지를 보내고, 남자는 때때로 아내의 환영을 보는 등 신경불안증세를 보인다. 죄의식으로 인해 남편은 점점 미쳐가고, 결말부는 수차례 반전을 거듭하며 범인에 대한 단죄를 지연시킨다. 남편, 아내, 모델, 재산관리인 김 부장의 배신과 연대가 여러 차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총 5번의 반전이 이루어지는 서사는 참신할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식 스릴러 영화의 제작 단계에 이르렀다는 역사적 신호이다. 

본격적인 소비자본주의 시대로 돌입한 한국사회 상황에서 서로 뒤통수를 치는 연쇄구조는 자본과 성에 대한 집착으로 탐욕적인 도시로 변해가는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다. 주인공들은 시크하고 차가운 표정, 그리고 실루엣을 강조하는 세련된 의상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자본을 추종하며 비인간화된 시대성을 상징한다. 영화는 소비자본주의의 핵심 주체로 등장한 여성들로 인해 권력의 자리에서 점차 물러나게 되어버린 남성의 위기감과 불안을 투사하는 한 측면이 있고, 또 한 측면에는 소비주체로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된 중산층 여성의 섹슈얼리티에의 욕망이 있다. 

대저택과 별장, 자가용, 화려한 의상, 장식물, 가구, 칵테일파티, 드레스, 샹들리에, 패션잡지, 벽에 걸린 사진액자, 치렁치렁하게 드리워진 커튼, 화장품, 마네킹, 실내 가운 등 소비재들의 병치는 스크린 공간을 반짝이는 원색의 스펙터클로 만들어낸다. 클로즈업으로 비춰지는 사물의 상징적 활용, 계속해서 사건을 오인하게 만드는 교차편집, 끊임없이 유동하며 불안감을 상승시키는 카메라 등 여러 면에서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적 장치가 효과를 발휘한다. 미장센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전시하는 것과 함께 소비와 탐욕의 시대를 잘 보여준다. 

과잉된 소비주의의 미장센과 과잉된 성적 욕구의 병치는 ‘자본과 성’의 기호로서 1980년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영화는 팜므파탈로 구성된 중산층 여성을 가해자로 바라보지 않고, 대신 진정한 주체로서 호명하는 파괴적 힘을 가진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인해 <여자는 비처럼 남자를 적신다>(이혁수, 1983), <여자의 대지에 비를 내려라>(노세한, 1985) 등 ‘여자’가 들어간 긴 제목의 여성 복수 영화의 제작이 연이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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