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홍콩영화의 창조적 비전, 지나간 20년과 다가올 20년
‘홍콩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홍콩 장르영화가 아시아 극장가를 호령하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그 영화들의 밑바닥에는 ‘1997년 홍콩 반환’이라는 당시로서는 불안한 미래를 향한 근심이 자리해 있었다. 체제의 변화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한편으로는 동시대 홍콩영화의 보편 정서를 과잉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그것은 아시아에서 가장 고도 자본화된 홍콩 영화산업이 공산 중국을 바라보며 느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공포가, 영화의 속살에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반영된 것일 게다. 바로 그때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의 전망은 맞으면서도 틀렸다. 홍콩영화는 1997년을 전후로 화려한 전성기를 뒤로 한 채 긴 침체기에 들어갔고, 중국 본토의 자본과 함께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홍콩 반환은 홍콩영화계에 있어 긍정과 부정 모두를 껴안은 양날의 검으로 존재한다.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해, 이번 홍콩영화제는 지나간 20년과 다가올 20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홍콩의 중국 반환 20주년을 기념해 7월 26일(수)부터 8월 8일(화)까지 열리는 한국영상자료원의 특별전 ‘영화와 공간: 홍콩’은 Create Hong Kong, 홍콩국제영화제협회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창조적 비전: 홍콩 영화 1997-2017’ 섹션과 한국영상자료원의 시네마테크KOFA에서만 특별히 상영하는 ‘KOFA 특별 상영’ 섹션으로 나뉘어 총 17편으로 풍성하게 꾸려졌다. ‘창조적 비전: 홍콩영화 1997-2017’은 홍콩, 중국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에서 한국영상자료원이 유일하게 개최하는 글로벌 프로젝트이며 런던, 베를린, 밴쿠버 등 주요 10개 도시에서 진행 중이다. 지난 20년간 큰 변화를 겪은 홍콩영화계의 현재가 바로 여기 있다. 그리고 여전히 홍콩영화가 흥미진진한 세계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매드 월드> 포스터
“홍콩은 미쳐가고 있다”는 영화 속 황 선생(증지위)의 말처럼, 웡 춘 감독과 플로렌스 챈 작가의 <매드 월드 一念無明>(2016)는 바로 그 홍콩 서민의 참담한 현재를 담담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칫 무미건조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이 작품이 올해 4월 초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이 홍콩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할 때 4위에 기록됐다는 사실은 당대 홍콩영화계의 희망적인 시그널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올해 홍콩 금상장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증지위), 여우조연상(금연령)을 비롯해 신인감독상(웡 춘)을 수상했다는 사실 또한 고무적인 일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황 선생(증지위)의 집에 장남 퉁(여문락)이 들어온다. 퉁은 정신병원에 있다가 이제 막 나온 참이다. 조울증으로 인해 친구들 사이에서 ‘미스터 사이코’라 불리던 그는 어머니(금연령), 아내 제니(방호민)와 함께 살았다. 그와 아내는 부지런히 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지만, 치매에 걸린 어머니로 인해 팍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고통은 끝날 줄 알았건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퉁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됐던 것. 그리하여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 해후하게 됐지만 이미 망가져 버린 삶은 별달리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가 아플 때 대체 어디 있었던 거냐”며 아버지를 비난해 보지만, 평생 트럭운전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던 아버지 또한 말 못 할 사연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 뚝 떨어져 미국에서 잘살고 있는 차남 춘은 가족의 연락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서먹서먹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세상을 등진 남편 퉁 대신 빚을 갚느라 영혼까지 피폐해진 아내까지, 그들은 그렇게 어떻게든 홍콩에서 살아가야 한다.
굳이 계보를 짚어 보자면, <매드 월드>의 웡춘 감독은 홍콩 사회파 영화의 대가라 할 수 있는 허안화 감독을 잇는 것으로 보인다. 혹은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산업화의 격랑을 관통하는 당대 홍콩 사회를 그려낸 <부자정>(1981)의 방육평 감독, 일찌감치 홍콩과 중국 본토 사이의 문화적 괴리감을 그려냈던 <사수유년>(1984)의 엄호 감독도 떠오르게 한다. <매드 월드>라는 영어 제목부터 이른바 ‘닭장 아파트’로 유명한 홍콩 하층민의 피폐한 삶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 아파트 공간 내부의 아버지와 아들을 부감으로 잡아낸 영화 포스터는 무척 인상적이다. 변변한 창도 없는 좁은 방 안에 이층 침대가 있고, 공동으로 화장실과 욕실을 이용하며, 부엌이 없는 구조라 대부분 포장 음식을 사와 끼니를 해결한다. 이웃 주민들 또한 종종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퉁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공간은 관계마저 악화시킨다. 그에 비하면 이번 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허안화의 <천수위의 낮과 밤>(2008)에 등장하는 홍콩의 재개발 지역인 천수위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차라리 호화롭게 느껴진다. 그처럼 반환 이후 홍콩의 삶은 과연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 말할 수 있을까.

<담배연기 속에 피는 사랑> (펑하오샹, 2010)

<심플 라이프> (허안화, 2011)

<미드나잇 애프터> (프루트 챈, 2014)
<매드 월드>는 최근 두드러지는 홍콩 감독들의 ‘로컬 시네마’ 경향을 보다 첨예하게 드러낸다. 성룡을 비롯해 서극, 진가신 감독 등이 본토 자본과의 결합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으로(물론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한 이들의 행보를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으로 볼 것은 절대 아니다) 허안화, 이동승을 비롯해 이번 영화제에 각각 상영되는 <메이드 인 홍콩>(1997), <담배연기 속에 피는 사랑>(2010)을 만든 프루트 챈과 펑하오샹처럼 보다 홍콩의 현실에 천착하는 작품을 내놓는 감독들이 있다. 역시 이번 영화제 상영작인 허안화의 <심플 라이프>(2011)가 보여주는 홍콩 요양병원의 풍경은 그 어떤 영화 속 홍콩의 모습보다 쓸쓸하다. 프루트 챈의 <미드나잇 애프터>(2014)는 닭장 아파트만큼이나 홍콩을 대표하는 교통수단인 미니버스를 정체성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홍콩의 축소판처럼 묘사했고, 펑하오샹의 <애버딘>(2014)은 실제 홍콩 해안지역인 애버딘을 중심으로 삼대(三代)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들을 포함해 <매드 월드>는 바로 ‘그럼에도 우리는 홍콩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런 가운데 웡 춘 감독은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스릴러적 구조로 치밀하게 축조하면서, 보다 장르영화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매드 월드>의 ‘월드’를 꽉 채운 것은 바로 배우들의 잊히지 않는 표정이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금연령의 존재감은 물론, 오래전 (역시 이번 영화제 상영작인) <무간도>(2002)에서 파트너를 이뤘던 증지위와 여문락이 무려 15년의 세월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로 만났다는 점이 깊은 감동을 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에서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그 못지않게 온전치 못한 아들이 업고 한 계단씩 걸음을 옮길 때, 홍콩 반환 전이든 후든 홍콩영화를 향한 나의 애정 또한 변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