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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반도의 봄

이병일,1941

[한국영화걸작선]반도의 봄  대표 이미지

<반도의 봄>(1941)의 첫 장면은 <춘향전>의 한 구절에서 시작된다. 영화 속의 영화 <춘향전>을 제작하는 과정을 통해, <반도의 봄>은 당대 현장에 개입했던 자본과 새로운 스타의 탄생, 그리고 그로 인한 오해가 쌓인 남녀의 관계를 담백하게 풀어낸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일컬어 ‘자기 반영적 영화’라고 한다. 실제로 영화는 작품을 창작하는 감독뿐 아니라, 반도영화사와 동아레코드 같은 당대의 대중문화 생산 공간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동경으로 떠나는 주인공을 환송하는 사람들의 얼굴 탓이다. 비록 주인공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지만, 그들을 환송하는 인물들은 어둡다. 마치 <400번의 구타>(1959)의 마지막 장면과 맞먹을 정도로, 이 쇼트가 주는 인상은 강렬하다. 아마도 현실의 답답함이나, 최소한의 책임감 있는 결말을 주려한 흔적일 것이다. 트래킹 되어 점점 좁아지는 화면에 마침내 한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이때 앙각으로 잡힌 그의 표정은 끝까지 암울해 보인다.

<반도의 봄>이 제작된 시기는 일제강점기이다. 때문에 대사의 절반 정도는 일본어로 되어 있다.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의 본격적 군국주의에 대한 조선영화의 응답으로 읽을 여지도 있다. 1936년 닛가츠 영화사 연출부에 입사하며 시작된 이병일의 영화 인생은 이 절묘한 데뷔작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일본에서 그의 영화 스승은 아베 유타카였다.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배웠던 인물로, 이 탓인지 언뜻 <반도의 봄>은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문법을 추종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다르다. 쇼트의 의미 관계가 소비에트 몽타주, 혹은 1930년대 일본영화의 장식적 스타일에 더 가깝다.

영화는 대체로 ‘팬과 트래킹을 이용한 롱쇼트와 부감, 딥포커스’를 사용해 공간연출을 완성한다. 먼저, 딥포커스 기법은 ‘반도영화사 발대식’ 장면에서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현실적 시간과 공간의 연결성을 유지하려 애쓴다.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되진 못하지만, 다양한 공간적 거리감이 단 한 번의 촬영으로 동시에 포착된다. 시기적으로 <시민케인>(1941)의 객관적 눈에 다다르지는 못하더라도, 이 장면을 위시해 영화가 꽤나 공들여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화면의 가로, 즉 ‘파노라마’를 대체한 팬과 트래킹 쇼트 또한 영화는 강조한다. ‘스태프들의 한옥 합숙소’ 장면이 대표적 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처음부터 세트장 지붕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이때 부감은 직부감 본연의 운명적 뉘앙스보다, ‘현장을 훔쳐보는 느낌’이나 ‘생생한 현실감’을 더하는 데 사용된다. 일반적 파노라마 기법이 줄 수 있는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무려 세 번의 연속적 팬이 삽입된다. 여러 명의 인물들이 화면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아벨 강스가 말한 “시각적 아코디언”을 이룬다. 이때 카메라의 움직임은 상황을 아우르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즉, 인물이나 사건은 이 장면의 주인공이 아니다. 카메라의 회전을 통해, 영화는 물리적 변수까지 포함하는 기하학적 프레임을 노린다.

이 밖에도 외화면(hors-champs)이 영화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프레임 바깥 공간을 화려하게 보이기보다, 차라리 고개를 돌려 더 많이 ‘보여줄’ 것을 택한다. 물리학적 측면에서 프레임 바깥에서 논의될 수 있는 요소들까지 모두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다. 대사는 물론이고, 민족적 감정까지 화면에 모조리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이 진짜 찍고 싶었던 작품은 <춘향전>이었는지 모른다. 

보통 영화가 액자구조를 취할 때, 액자 바깥의 주인공이 내부의 인물을 살피며 진행되는 ‘중첩 구조’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반도의 봄>은 실질적이고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내부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점이 특이하다.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더불어, 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입장, 그리고 별개의 멜로드라마 플롯이 동시에 만난다. 어쩌면 단순한 액자구조가 아니라, 관객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것 같다. 소위 말하는 미장아빔(mise en abime)으로 확대될 여지가 있다. 앙드레 지드에 의해 유명해진 이 기법은 말 그대로 ‘심연(abime)으로 끌어당기는’ 중첩된 구도를 뜻한다. 닫힌 액자가 아니라 ‘열린’ 액자이다. 마치 양측으로 거울이 달린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마냥, 영화의 이야기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뻗어 나가게 된다.

<반도의 봄>이 여러 미학적 장치를 통해 추구하는 효과는 일정하다. 바로 ‘사실주의적 성향’이다. 어쩌면 ‘진실감의 확보’라 부를 수 있는 초기 사실주의의 고뇌를 이 작품은 고스란히 안고 있다. 영화 속의 영화로 하필 ‘춘향전’이 선택되었는가 하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춘향전이 가지는 의미, 그것은 소설의 내용과 더불어 그 소설 자체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를 일깨워준다. 일차적으로 춘향의 이야기가 액자 속 영화로 삽입되면서 얻는 효과는 ‘비교’의 힘일 것이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춘향은 명백한 ‘소설’ 속의 인물이다. 이를 통해 <반도의 봄>은 이야기 바깥의 사실성을 역으로 확보한다. 더군다나 이 소설의 결론에 대해 관객들은 ‘보지 않아도’ 안다.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것과 더불어, 신분의 차이가 지속적으로 그녀를 괴롭힐 것이란 사실까지 말이다.

이제 문제는 마지막 장면이다. 카메라는 주인공이 아니라, 환송하는 자를 마지막으로 비춘다. 이 결말은 좀 더 신중하게 언급되어야 한다. 이병일의 <반도의 봄>은 비교적 자세히 한 소설을 재해석하고, 실제와 비슷한 톤으로 당대 현실을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영화이다. 그런데 이 생략이 없는 영화에서 소설의 결말만은 과감히 생략된다. 어쩌면 트뤼포의 앙투완이 그러했듯,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이 마냥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감독은 에둘러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 탈출이 과연 현실과 겹쳐질 때도 승리가 될지, 우리는 짐작하여야 한다. 아무튼 영화는 표면적 해피엔딩을 맞고, 춘향전의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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