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피아노와 아이
이현미, 2016
누군가의 작품을 평가하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비평이라는 미명 아래 일종의 권력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때론 작품에 대한 평가가 평론이나 리뷰를 넘어서, 심사라는 제도적 행위일 때는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평가 잣대를 들이대면서 여러 창작물에 서열을 매기고, 거기에 따라 제한된 보상이나 특권을 배분하기 때문이다. 힘들게 (그러면서도 야심 차게) 만들었던 작품이 심사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일을 숱하게 경험했던 나 자신의 트라우마도 한몫 거든다. 그리고 심사의 임무를 맡다 보면 관객으로서 온전히 작품을 즐길 기회를 날려 먹고 만다.
작년 인디애니페스트에서도 한국독립애니메이션 협회 소속의 동료들과 함께 KIAFA 특별상 수상작을 선정해야 했다. 관객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했지만, 반대급부로 발견의 희열에 들뜨기도 했다. 희열이 너무나 강렬해서인지, 선정을 마친 직후 작성한 ‘심사의 변’은 A4 두 장 분량이었다. 영화제 측에서는 ‘평소에 그런 성실성을 발휘할 것이지’라는 속내를 애써 감추면서,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4줄로 줄여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기왕에 마련한 원문은 나중에 더 나은 지면에 발표하기로 하였다. 판단하건대, 지금 이 애니메이션 리뷰 섹션이 제일 적합할 것 같아서 싣고자 한다. 때론 리뷰나 비평이 영화제 심사평의 말투로 쓰이는 것도 일종의 현장감을 전달할 수 있는 방편일 테다.
“KIAFA 특별상은 한국독립애니메이션 협회 회원들이 선정한 상입니다. 협회 회원들이 특별한 위치에서 간택한 상이 아니라, 독립애니메이션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작품에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상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특별상 작품은 올해 독립애니메이션이 어떠한 모습인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독립애니메이션은 그것이 놓인 현실 속에서 반응하고, 이전까지 독립애니메이션이 성취해낸 것들로부터 한 발짝 더 내딛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불안은 지속되고, 불만은 쌓이며, 지치기도 하고, 혼란과 혼돈 속에서 잠시 방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혹은 잊고 있던 것을 환기시켜주는 작품이 있다면, 마땅히 협회 회원들은 그 작품을 반갑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회원들을 대표한 심사위원들이 수상 후보작들을 꼽을 때, 서로가 내세운 작품들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지닌 기준과 미덕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일치는 긍정적인 현상입니다. 독립애니메이션 협회에 소속된 창작자들이 다양한 가치와 취향을 견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러한 차이를 저마다 정당한 근거와 신념을 가지고 기꺼이 상대방을 설득하고 있다는 확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심사 위원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너무도 수월하게 특별상 수상작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심사위원들은 무척이나 따뜻한 행복감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기분은 우리가 상영관에서 그 작품을 보고 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기분이었을 겁니다.
이 작품은 애정에 대한 회복을 다룹니다. 처음에는 좋았으나, 어느 순간 도망치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워하는, 그래서 다시 좋아하게 되었을 때는 그 이전보다 한껏 성숙해진 성장을 다룹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를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 이미 겪어봤던, 자연스러운 기억의 한자락이니까요.
그렇다고 이 작품이 과거로 퇴행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창작을 하는 이들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애니메이션 창작자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부터 출발했지만, 창작의 과정이 너무나 힘겹기 때문에 늘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금 힘들어하는 창작자의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며, 잠시 애니메이션에서 떠나 있는 동료들에게 ‘언제든 돌아와도 돼’라는 안부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도 인사를 건넵니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그들이 혹여 애니메이션 자체에, 또는 한국의 애니메이션에, 또는 한국의 독립애니메이션에 실망했다거나 낯섦음을 느꼈다면, 그러한 선입견과 편견을 잠시 접고,’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두근거림과 설렘을 다시 떠올려보면 어떨까?’라며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자 합니다.
이 작품에게 KIAFA 특별상을 수여하는 이유는 단지 스토리와 메시지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꽤나 중요한 미적 탐색과 성취 또한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미지와 활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작품의 형식 속으로 끌어들여 애니메이션의 표현 언어를 확장시켰습니다. 이미지와 활자가 움직임과 시간 속에서 만나는 일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때부터 현재의 모션툰이나 모션그래픽 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시도되었지만 여러모로 만족스럽지는 못했으며, 특히 애니메이션의 영역에서 보자면 여전히 서툴고 어색할 뿐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이미지와 만나는 활자는 그저 대사를 전달하는 표식에 그치지 않습니다. 활자는 자체로 멋진 형태를 보여주고, 대화 속 감정과 분위기를 담아내며, 작품의 흐름과 호흡을 조절합니다.
이미지와 활자의 만남은 무엇보다 우리가 처음으로 글과 그림을 통해 이야기를 접했던 바로 그 순간, 즉 그림책을 마주한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때 우리는 더듬거리며 글을 익혔고, 그림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림책이라는 텍스트는 한번 소비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닳고 닳을 때까지 늘 새롭게 읽어낼 수 있었던 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림책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어떻게 해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작품 덕분에 그동안 잊고 있던 기본들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늘 초심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초심이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이 작품 덕에 독립애니메이션 협회의 창작자들은 다시 작업대 앞에 앉을 수 있을 테고, 고단함에 묻혀버렸던 설렘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볍게, 경쾌하게, 즐겁게… 그렇게 프레임 하나하나의 무게가 덜어진다면, 우리는 비로소 창작의 맛을 제대로 느낄 것입니다. 깨달음을 주신 감독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