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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의 두 꼽추 The two revengeful hunchbacks

임권택, 1971

원한의 두 꼽추 The two revengeful hunchbacks 대표 이미지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아니다. 아마 제목을 보고 먼저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원한의 두 꼽추>는 무협영화이다. 그렇게 부르기는 했지만 그 시절 충무로에서는 일부러 (해서는 안 될 유치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으로) ‘칼쌈’ 영화라고 부르거나 칼 소리가 부딪친다고 해서 의성어를 빌려 ‘짠짠바라’라고도 불렀다. 물론 이 표현은 일본영화에서 시대활극이나 임협물(任俠物)의 ‘殺陳’ 활극 시퀀스를 부르는 짠바라(チャンバラ)에서 온 말이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무협영화는 1967년 <풍운의 검객>으로 일시적으로 나타났고 그런 다음 <잡초> ‘이후’ 그의 목록에서 완전히 사라진 장르이다. 종종 무기력한 방향상실. 나는 지금 <뇌검> <월하의 검> <비검> <요검>, 그리고 <삼국대협>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 제목들을 연도별로 순서대로 썼다. 이 영화들이 기괴해 보이는 것은 시행착오를 통해 자기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간 임권택의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점점 나빠져 갔다는 것이다. 임권택은 이 영화들에 거의 공감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시절 연달아 서울에서 개봉한 호금전의 <용문의 결투>와 장철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獨臂刀)>를 흥미진진하게 보았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영화적으로 아무런 공명을 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임권택은 이 실패들을 이미 준비된 결과처럼 받아들였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직업감독으로 그저 제안을 받으면 찍어야 했던 그런 시절이 내게 있었던” 영화들이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임권택은 이 영화들을 만들면서 반대로 직업감독으로서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사라져 가는 과정에 놓인 증명은 아닐까. 몰락해가는 영화산업. 참혹한 이중검열. 한국영화에서 1970년 혹은 1971년은 설명하기 까다로운 시간이다.

<뇌검> <월하의 검> <삼국대협> 포스터
<뇌검> <월하의 검> <삼국대협>
 
이 영화는 제목이 두 개다. 다른 제목은 <흑룡가의 쌍검>인데 (영진공 시절에 정리한) 예전의 감독 연보에는 두 편의 제목이 마치 다른 영화처럼 각각 등재되어 있었다. 같은 영화사. 같은 감독. 같은 배우, 같은 각본, 같은 촬영. (정리된 문헌에 따르면) 거의 같은 내용. 그래서 처음에는 한 편의 영화 스텝들과 배우들을 이끌고 동시에 두 편의 영화를 만들 줄 알았다. 1970년대에는 종종 그렇게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들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 감독이 제작자일 때 스텝들과 배우와 한 편의 영화 계약을 한 다음 시침 뚝 떼고 한 편의 영화를 찍는 척하면서 약간씩 대사와 세트를 바꾸면서 두 편의 영화를 찍고 나중에 편집해서 둘로 나누어 개봉했다가 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정리된 자료에서 <흑룡강의 쌍검>이라는 제목은 사라졌고 영화 자막에 올라오는 대로 <원한의 두 꼽추>만 남았다. 그런데 사라진 제목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우선 이 영화에는 중국 동북부와 내몽고 국경 사이를 흐르는 헤이룽강(黑龍江)은 고사하고 강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쌍검은 한 명의 무사가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다니는 것인데 아무도 두 자루의 검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자루의 검이 각자 나뉘어서 운명을 따라 순환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문제가 되는 천검(天劍)은 단 한 자루의 명검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기구한 운명으로 서로 헤어져 자란 두 쌍둥이 형제를 비유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조롱하듯이 말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좀 기묘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내 관심은 여기에 있다. 한걸음 뒤로 물러난 <원한의 두 꼽추>는 마치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임권택에 대해서 미처 다른 영화들이 말하지 못한 것을 거의 외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자포자기가 항상 가로막고 있던 어떤 방어선을 일시적으로 치워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방어선? 그렇다. 내가 1960년대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반복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약간 추상화된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문법과 다소 두렵다는 듯이 공동체의 운명에 복종하기라도 하는듯한 굴복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공백이다. 서로 비대칭인 둘 사이의 거리는 임권택이 그것을 조선 시대, 혹은 한국전쟁의 전쟁터, 그리고 휴전 이후의 남한 사회에서 할리우드 장르영화들이 요구하는 것을 수행하려는 데서 발생한 것(들)이다. 그런 다음 그 공백을 메우는 과정에서 임권택은 풍경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가혹한 삶을 보았고, 다시 한 번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순의 시간이 근대의 역사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밀고 나아갔다. 나는 먼저 임권택이 이상할 정도로 웨스턴 영화들에 대한 열렬한 애호가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물론 웨스턴이 일본 시대활극 영화들을 경유하여 홍콩에 도착했고 그런 다음 대만 무협소설과 결합하여 무협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임권택은 그런 계보에 관심이 없었다. 분명히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돌아온 왼손잡이> <황야의 독수리>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를 만들었을 때 임권택은 틀림없이 자신이 본 웨스턴 영화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그의 영화에서 누군가는 안소니 만을 볼 것이고, 누군가는 오토 플레밍거를 찾아낼 것이며, 아마 대부분은 윌리엄 와일러와 조지 스티븐스를 떠올릴 것이다. 이 영화들은 웨스턴 영화들의 거의 끝나가는 종말기에 마주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악당들은 이제 더 이상 바깥에서 찾아오지 않으며, 주인공은 불안에 떨고 있고, 정의가 지켜지는 것은 종종 서사의 차원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계보를 그려보는 것은 좀 더 나중에 할 생각이다. 하지만 임권택에게 좀 이상한 방법으로 할리우드영화의 고전주의가 지닌 우아한 아름다움이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다소 당혹스러워진다. 이를테면 드라마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한순간 그 신을 어떻게 찍을 것인지를 몰두하는 것만 같은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 예상치 않은 상황이 나타난다. 임권택은 고전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을 가진 것처럼 보존하고 싶어 한다. 단지 이것은 권선징악이라든가 아니면 비극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여튼 결말을 맺어야 한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의 비극은 다른 데서 온다. 임권택은 어떤 경우에도 차라리 주인공이 희생될지언정 세상이 몰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물러난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영화에서 기쁜 엔딩이 드문 이유인지도 모른다. 약간 과도할 정도로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가끔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이미 바로크 시대에 접어든 웨스턴 영화에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감명받은 데서 오는 흔적일 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이 바로크적 미장센들은 1969년 혹은 1972년을 통과하면서 대부분 망가져 버렸다. 장기적인 과정에서 그 자신의 탈색과정, 하지만 일시적으로 그것이 이 시기의 임권택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원한의 두 꼽추>는 이 시기에 놓인 영화이다.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첫번째 시간: 약을 탄 술을 마시는 지원필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두번째 시간: 꼽추가 된 지원필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여기서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한 파편 속에서 무엇을 물구나무 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몹시 번잡한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에 다소 따분하지만 도식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택할 생각이다. 우선 세 개의 시간. 첫 번째 시간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이다. (이 장면은 이야기 도중에 흑백으로 되돌아간 다음 (flash_back) 진행된다) 검술의 한 유파에서 다음 장문을 가리는 자리인데 사형인 지원필은 가장 무술이 뛰어나지만 장문의 딸인 달래는 그의 경쟁자인 진수왕을 사랑한다. 그래서 장문을 가리는 자리에서 진수왕이 이길 수 있게 음모를 꾸며 지원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척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약을 탄 술을 권한다. 지원필은 대결을 하다 쓰러지고 진수왕은 그의 등을 내리쳐 꼽추로 만든다. 뛰어난 무술을 가진 남자의 약한 마음을 파고든 사악한 계획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그 여인의 비열한 애인. 공모 앞에서 좌절한 미래의 시간. 그러므로 이 남자는 이제 미래의 시간을 되찾고자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불구가 되어버린 이야기. 두 번째 시간은 첫 번째 시간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벌려놓은 다음 다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가 영화의 첫 장면이다) 꼽추가 된 지원필이 돌아와 진수왕에게 대결을 신청한다. 무술로는 지원필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진수왕에게 그의 아내가 된 달래가 그의 친구인 정태성을 찾아가 모든 검을 잘라버리는 명검 천검(天劍)을 빌려오면 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는 검을 빌려 줄 리가 없다고 하자 그러면 빼앗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재촉한다. 새로운 음모. 새로운 적. 새로운 복수의 계열이 여기서 생겨난다. 진수왕은 그의 친구를 죽이고 후환이 두려워 마침 절에서 아이를 낳은 그의 아내까지 참하려 한다. 그의 아내는 쌍둥이 청과 용을 낳았는데 진수왕의 부하들이 절에까지 찾아오자 자신은 청을 감싸 안고, 그리고 하인은 용을 안고 도망친다. 낳자마자 헤어진 형제, 그들의 기구한 사연. 그들은 성장한 다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째 시간의 복권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은 둘로 나뉜 그들 사이를 확인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하나를 둘로 나누고 그런 다음 이중으로 동여맨 세 개의 이야기. 아내는 부하들에게 쫓기다가 청을 절에 숨겨놓은 채 자신의 몸만 피신하고, 하인은 용을 나무에 숨겨놓고 부하들의 눈을 자신에 돌린 다음 죽음을 맞는다. 마침 진수왕과 대결을 하러 가던 지원필은 숲에 숨은 진수왕의 부하들과 싸우다가 그만 나무에 숨겨놓은 아이를 적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상처를 입히고 급히 달려간 의원으로부터 이 아이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꼽추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미처 계산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던 실수. 자신의 원수에게 꼽추가 된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이번에는 자신이 꼽추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야만 하는 운명에 떨어진다. 무엇이 무엇을 삼켜버리고 있는 것일까. 비극 안의 비극. 참극 속의 참극. 죄 값을 받기 위해 찾아간 자가 새로운 죄 값을 치르는 자리에 간다. 지원필은 진수왕과의 대결에서 천검에 그의 칼이 잘리자 몸을 피신한 다음 꼽추가 된 아이와 함께 산에 묻혀 살아간다. 여기까지 영화가 시작된 지 17분 동안의 이야기이다.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세번째 시간: 꼽추가 된 용
 
그런 다음 세 번째 시간이 시작한다. 마치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의 서론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서 갑자기 긴 시간을 건너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벌어질 사건들은 시간의 기호들을 놓고 다투는 해독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꼽추가 된 용은 어른이 되었고 지원필을 아버지로 삼아 산속 오두막에서 살아간다. 청은 산사의 절에서 스님으로부터 무술을 전수받고 속세로 돌아온다. 당신이 상상하는 다음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청과 용은 형제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여기에 지원필이 가세해서 진수왕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그렇게 풀려나간다면 <원한의 두 꼽추>가 당신을 안심시키기는 하겠지만 너무 진부해서 더 이상 볼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세 번째 시간이 복수의 활극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차례로 우리의 기대를 차단시킨다. 우선 지원필은 용에게 복수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진수왕에게 복수를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는 그냥 주어진 세계 자체를 인정한다. 그는 마치 복수 대신 다른 어떤 것을 하면서 살 수도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어떤 것? 아버지의 자리.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자리. 그는 용이 자기 품에 안겨 꼽추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게 자신의 진정한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은 지원필로부터 어떤 무술도 전수받지 못했다. 청은 (아마도 과거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하는) 스승으로부터 자신의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으며 속세에 나가서도 자신보다 뛰어난 무술을 지닌 고수들이 있으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그러므로 청은 자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동생에 관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다. 그 둘이 쌍둥이이기는 하지만 둘 사이를 오간 재빠른 이미지의 교환을 통해서(parallel_editing)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좀 더 중요한 순간은 스승의 교훈이다. 늙은 노승은 청이 지닌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에게 복수 따위란 처음부터 청이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는 기회를 준다. 의무로부터 풀려난 자유. 하지만 영화가 이제부터 할 일은 당연히 청의 자유를 다시 의무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때 여기에는 정말 그 의무가 자유를 포기하고서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뒤따라 올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두 사람을 셈에서 빼놓으면 안 된다. 한 사람은 물론 복수를 하기 위해 두 번째 시간에 돌아온 지원필이다. 만일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진수왕은 친구 정태성의 명검 천검을 빼앗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청과 용은 헤어질 이유가 없으며, 그렇게 되면 용은 꼽추가 될 이유가 없으며, ...으로 이어질 연쇄적인 사건들. 그런데 세 번째 시간이 되자 용을 키운 지원필은 정반대로 복수를 완전히 포기한다. 그는 용에게 마을로 내려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 이유는 다시는 진수왕과 다시 얽히는 순간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용이 모피를 팔기 위해 마을에 내려가 진수왕의 아들과 만나면서 마찰이 벌어지고 지원필은 자기 발로 진수왕을 찾아가게 된다. 여기서 그 둘 사이의 멋진 대결의 순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지원필은 이미 대결할 수 없는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지팡이에 의지하고 몸을 불균형하게 뒤뚱거리면서 가까스로 진수왕의 성에 이른 다음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용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복수를 포기한 지 오래이며 이미 그럴 수도 없는 처지임을 몇 번이고 호소한다. 여기엔 나중의 결정적 장면을 위한 카타르시스를 상승시키기 위해 무언가 우리를 괴롭히면서 준비된 어떤 카드도 없다. 정말 그는 복수할 의사가 없으며 또한 그 순간을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오로지 감옥에 갇혀있는 용을 구하겠다는 생각뿐이다. 말하자면 지원필은 여기서 완전히 아버지가 되어있다. 그가 겉보기에는 비루해졌지만 오히려 지원필만이 유일하게 복수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에 누구보다도 충실해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원필만이 유일하게 두 번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한의 두 꼽추>가 몹시 우스꽝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원인이 있자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통적인 주인공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에게 부여된 의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된 고전적인 주인공에로의 어떤 점핑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임권택은 분명 여기서 카타르시스와 냉소적으로 대결하고 있다.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청과 용의 어머니
 
두 번째 인물은 아마도 당신이 잠시 잊었을 청과 용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두 번째 시간에서 청을 버리고 무사히 도망쳤으며, 그런 다음 의미심장하게도 용과 청이 진수왕의 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녀도 마을의 주막을 찾아온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야겠다. 그녀는 청과 함께 마을에 들어선다. 물론 아직 그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마치 거기에 모성의 직감이 작동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러이 그녀 얼굴로 다가간 카메라(zoom_in)를 통해 드러난 약간의 놀라움을 담은 표정이 말없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야 용이 빼앗긴 모피를 찾기 위해 주막에 찾아오면서 세 사람은 처음 한자리에 모인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두 쌍둥이의 어머니는 청을 보자마자 한 눈에 알아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용을 볼 때에는 그저 사태를 구경하듯이 쳐다본다. 이 장면만을 떼어놓고 보면 잘 설명이 안 된다. 

그런데 한참을 더 지난 다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롱 테이크와 마주하게 된다. 문제의 신. 마침내 지원필과 용의 어머니이자 정태성의 아내를 만났을 때의 장면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임권택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 중의 하나이다. 다소 길긴 하지만 이 장면의 대사는 전부를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임권택은 수없이 잘게 쪼갠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을 끊지 않고(long_take) 한 번에 찍었다. 지원필은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면서 대사를 하고 두 번 마치 심리적인 마음의 동요를 찍는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에 다가간(zoom_in) 다음 다시 물러난다(out).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01:06:59 ~ 01:08:18 롱테이크
 
_ “용을 어디다 숨겼나?”
_ “당신이 가진 검법을 용에게 전수해준다는 약속을 해주면 만나게 해드리죠”
_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_ “용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진수왕을 죽여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신 남편의 원혼을 위로해드려야죠”
_ “용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_ “아직은...”
_ “댁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_ “물론...”
_ “댁은 내가 용을 어떻게 키웠는지 잘 모르실 겁니다. 핏덩이 어린 것을 그저 안고 비바람 눈보라 치는 긴긴 세월 헤매면서 이집 저집 돌며 동냥젖을 빌어 먹이며...”
_ “말씀을 안 하셔도 짐작은 갑니다. 하지만 용은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_ “어린 것을, 그 불쌍한 어린 것을 죽음 속에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소”
_ “그게 자식 된 도리입니다”
_ “내가 대신 원수를 갚아 드린다면?”
_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_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
_ “...물론”
 
나는 처음에 이 장면 앞에서 몹시 당황한 나머지 이제까지 영화를 보면서 이들 사이의 인물 관계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했다. 대사를 따라가면서 차례대로 열거해보자. 우선 첫 번째, 어머니는 지원필을 만난 다음 용을 그동안 길러준 것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용을 납치한 사람은 그를 낳은 어머니이다. 그런 다음 기른 아버지를 협박하고 있다. 그녀는 용에게 단 한 번도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히거나 혹은 따뜻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어머니는 지원필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용에게 검술을 가르쳐줄 것을 요구한다. 누구라도 반대의 판본을 떠올릴 것이다. 만일 여기서 지원필이 이제 생모가 나타났으니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며 내 갈 길을 가야겠소, 그러니 나머지 일은 당신들이 서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난 이미 복수를 포기했소, 라고 해도 사실 그를 붙잡을 명분이 없다. 그런데도 용의 어머니는 용을 볼모로 삼으면 지원필이 반드시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의 이상한 주술관계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바란다. 여기서 마치 그 두 사람은 부모의 자리가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넷째, 용의 어머니는 용이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면서 그에게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용은 왜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차라리 그의 행위는 복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게다가 용의 어머니는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조차 없다. 그렇다면 용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다섯 번째, 더 이상한 것은 지원필의 반응이다. 그는 생모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 역할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심지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용의 부모는 그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라 그를 키운 지원필인 것처럼 보인다. 여섯 번째, 가장 이상한 대화는 마지막 순간에 벌어진다. 지원필은 차마 용이 피를 보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내가 대신 원수를 갚아준다면?”이라고 말을 한다. 잠깐만. 그런데 진수왕은 동시에 지원필의 원수가 아니었던가. 그는 자신이 꼽추가 된 사연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렇게 말하겠다. 여기서 지원필에게 첫 번째 시간의 계열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제부터 지원필은 그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용을 위해서 진수왕과 “죽음 속에 몰아넣는” 대결로 뛰어든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용의 어머니이다. “그 불쌍한 것을 죽음 속에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소”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은 복수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 행위는 사실상 자살적 몸짓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단호하게 “그게 자식 된 도리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대답을 계산해보고 싶다. 지원필은 복수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경고하는 데 그래도 그걸 해야 한다고 말할 때 용의 어머니는 만일 그걸 할 수 없다면 자식으로서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는 말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죽음이 어머니로서의 그녀뿐만 아니라 죽은 남편의 아내로서의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다음 가장 이상한 질문과 대답이 등장한다. 지원필은 그래서 자신이 대신 복수를 하겠다는 질문을 하자 용의 어머니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대답 앞에 약간 멍해졌다. 용은 물건이 아니다. 혹은 금은보화가 아니다. 용은 사람이다.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심지어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먼저 지원필의 뜻을 잘 알기라도 하듯, 그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한 번 더 반복하자면)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심지어 지원필은 그 대답을 받아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라고 다시 묻는다. 용의 어머니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지은 다음(zoom_in)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라고 했나요? 그 질문에 대해서 용의 어머니의 올바른 대답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이라는 일망의 망설임이 거기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그 요구에 대해서 “...물론”이라는 대답이 가져오는 의미의 반사적인 메아리는 얼마나 이상한가. 그 대답에는 만일 당신이 아들을 대신해서 남편의 복수를 수행한다면 나는 기꺼이 아들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이 압축되어 있다. 그건 남편의 복수가 아들의 의미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용의 존재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인지, 잠시 동안 그 둘 사이에서 어리둥절해진다. 

지금 이 두 사람의 거래는 얼핏 보기에는 장르의 규칙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는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서로의 대사를 따라가면서 이런 거래를 보는 영화는 무협영화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이다. 그때 이 두 사람은 언제나 아이를 사이에 놓고 낳은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의 만남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아이가 보고 싶어서 낳은 어머니가 찾아오고 기른 어머니는 차마 기른 정 때문에 아이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다소 아이러니한 심정으로, 희미하게라도, 하지만 누구라도, 정소영의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떠올렸을 것이다. 1968년 7월 16일에 개봉한 다음 가장 유명한 멜로드라마 중의 한편이 된 영화. 어린 아들 김정훈을 사이에 둔 두 엄마 문희와 전계현. 물론 둘의 거래는 여기서 갈라선다. 가난한 형편의 낳은 어머니는 부잣집 기른 어머니를 만난 다음 그녀가 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이를 부탁하고 돌아선다. 아이를 낳지 못해 기른 엄마는 낳은 엄마에게 그 아이를 잘 기르겠다고 맹세한다. 물론 그다음 다시 우여곡절이 있다. 하지만 지원필과 용의 어머니는 기른 아버지와 낳은 어머니라는 비대칭을 사이에 둔 다음 고통스럽게 대중들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감의 감상적인 눈물을 냉소적으로 뒤틀기 시작한다. 낳은 어머니는 기른 아버지에게 그 정을 미끼로 하여 자기의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얼핏 보면 그녀는 아내로서 충실하기 위해 어머니의 자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비대칭을 좀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죽은 남편은 아내가 자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포기하는 것과 이제 돌이킬 수 없게 이미 죽은 자신의 헛된 복수를 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권했을까. 지금 지원필이 빼앗으려는 것은 사실상 용의 아버지의 자리, 그러니까 용의 어머니의 남편의 자리인 것이다. 차라리 그녀는 용을 지원필로부터 빼앗아 강제로 삭제된 남편의 자리에 돌려보내서 가문을 잇게 만드는 것이 진정해야 할 일이 아닌가. 좀 더 도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유령이 되어버린 남편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 아들인 용이 가문으로 돌아와 공백을 메울 때 비로소 그녀의 진정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미워도 다시 한 번>(1968) <마더>(2009) 포스터
<미워도 다시 한 번>(1968) <마더>(2009)

그러나 우리를 좀 더 복잡한 심경으로 이끄는 것은 그 둘의 자리 그 자체이다. 우리들에게 모성애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문화의 거의 모든 코드에서 가장 보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자식에게 희생적이며, 자애롭고, 언제든지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가족 안의 희생양. 이 사랑의 과잉을 실재의 자리에서 가까스로 다룬 영화가 봉준호의 <마더>이다. 그러나 임권택은 이 자리에 아버지를 가져다 놓은 다음, 그것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 기른 아버지를 가져다 놓은 다음, 그 자리에서 낳은 어머니를 대립시킨다. 그런데 그 대립은 성립하는 것일까. 누구라도 여기서 멈칫 한 다음 그 둘 사이에 어떤 비밀이 담긴 서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을 가질지 모른다. 그런 건 없다. 이 설명을 위해서 여기에 미처 등장하지 않았지만 셈에 포함시켜야 할 세 번째 등장인물을 생각할 차례이다. 그건 이 자리에 없는 다른 한 명의 쌍둥이 청이다. 내가 영화를 다 본 다음 다소 의아하게 여긴 것은 청과 용 둘 사이에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단 한 번도 구분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는 물론이고 이 순간을 지난 다음 마지막 장면까지 그들은 서로를 부른 적이 없다. 더 이상한 것은 이 형제는 끝내 힘을 합쳐 아버지의 원수 진수왕과 싸우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지원필이 힘겹게 진수왕과 그의 아내 달래와 그의 아들과 싸우는 동안에도 청은 자신의 원수를 위해 용과 싸우다가 (이미 그럴 필요가 지난 서사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목 하나를 잘라버리기까지 한다. 청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어떤 때는 지원필과 용을 돕고, 어떤 때는 진수왕의 식객으로 머물면서 그의 편을 든다. 마침내 청이 용의 칼에 찔려 숨지면서 그의 옷 속에 숨겨져 있는 형제임을 밝히는 문신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둘은 비로소 포옹한다. 그리고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중인 것일까. 임권택에게는 기이한 계산법이 있다. 너무나 이상한 계산법. 누군가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공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어느 쪽에 서서 바라보건 계산법 자체를 무시한다면 그 이후를 더 이상 따라오기 힘들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신기하게 바라본 것은 청과 용이 힘을 합치는 대신 죽을 때까지、장르의 컨벤션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정말 죽을 때까지, 그 둘이 마주 싸운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나만 남아야 한다는 듯한 칼부림. 이때 이 장면을 거슬러 올라가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혹시 처음부터 둘 중 하나만 남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머니는 용에 대해서 별다른 욕심이 없다. 그녀는 두 명의 쌍둥이 중에 청은 알아보면서 용은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다음 용이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 사실을 숨기는 것은 지원필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심지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아들을 담보로 하여 지원필을 협박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아본 청에게는 단 한 번도 복수를 요구한 적이 없으며 그걸 전달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지금으로 충분하고 앞으로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달라는 것만 같은 태도. 자식과 어머니 사이에 벌어진 이 이상한 채무관계. 

이와 비슷한 관계를 임권택의 영화에서 십 년 후에 다시 보게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그 영화는 <길소뜸>이다. 물론 <길소뜸>과 <원한의 두 꼽추> 사이에는 단순하게 시간적인 간극 이상의 복잡한 설명을 요구하는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요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태를 단순하게 만들고 싶다. 줄거리의 환기. 낳은 어머니 화영은 한국전쟁 때문에 그만 아들을 피난통에 잃어버린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재혼을 하고 다른 자식들을 낳는다. 그 아이의 아버지 동진은 그녀를 오랜 시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역시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는다. 그런 다음 KBS 방송국이 벌인 이벤트인 ‘이산가족 찾기’를 위해 여의도에 펼쳐놓은 만남의 광장에서 우연히 (필연적으로?) 다시 만난다. 잃어버린 자식을 함께 찾던 두 사람은 어쩌면 아들일 지도 모르는 석필이라는 사내를 만나러 춘천에 간다. 석필도 결혼을 했고 자식이 있다. 그런데 그동안 석필은 고아로 함부로 자랐으며, 교양도 없이 거칠고, 사사건건 화영과 부딪친다. 아니, 그보다 화영은 석필을 보자마자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이 사내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한다. 단지 세월이 이 두 사람을 낯설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 놓인 계급이 어머니와 아들을 갈라놓는다. 그 둘 사이엔 어떤 정도 없다. 석필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돈 많은 여자가 나타난 것이며 자신을 어떤 조건도 없이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경제적인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화영은 그걸 느낀다. 이 사내가 지금 자기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복원 혹은 화해)가 아니라 돈이라는 사실을 본다. 화영은 유전자 검사를 요구해서 그걸 구실로 하여 석필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다음 현재의 가족들을 만나러 떠난다.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의 아들과 어머니

길소뜸 스틸이미지

길소뜸 스틸이미지

길소뜸 스틸이미지
<길소뜸>의 아들과 어머니

두 어머니는 거의 동일한 이유로 자기가 낳은 아들을 부정한다. 그것은 그 아들의 사회적으로 추락한 지위이다. 그리고 그 추락의 과정을 통해 학습된 행동이 즉각적으로 거부의 태도를 불러일으킨 다음 그 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다. 좀 더 괴상할 정도의 유사한 장면을 지적할 수 있다. (<원한의 두 꼽추>에서) 용은 죽은 동물의 껍질을 벗긴 모피를 들고 와 진수왕의 아들과 흥정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머니와의 첫 번째 대면이다. 좀 더 정확하게 용은 어머니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어머니는 그가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채 쳐다본다. 서로에 대한 지식의 바깥에 놓여있지만 총체적인 국면의 지식 속에 놓인 그들. (<길소뜸>에서) 화영과 동진, 그리고 석필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지나가던 개를 그만 치어 죽인다. 석필은 피 흘리며 죽은 개를 안고 횡재를 한 표정으로 보신탕을 해먹자고 할 때 화영은 그 모습을 보고 치를 떨며 내다 버리라고 소리 지른다. 여기서 단지 두 사람 사이의 차이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세월의 간극이 이 둘 사이에서 공백의 정치학을 작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물론 임권택은 그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거나 역사적인 인과관계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그 대신 현존재의 시간이 자기 앞에 놓인 공백의 간극과 마주쳤을 때 그 앞에 놓인 가늠할 수 없게 깊은 심연의 무시무시한 재난을 임권택은 영화라는 방법을 동원해서 그 두 개의 시간을 오간 다음 몸서리치게 쳐다본다. 

내 질문은 여기에 있다. 한쪽은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설명되는데(<길소뜸>) 다른 한쪽은 어떻게 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장면에서 작동하는 모성애의 기계는 완전하게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여기서 기계라는 말은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완전하게 (캉길렘에서 출발하여 푸코를 경유한 다음 가타리를 거쳐 흘러들어 간) 들뢰즈에게서 빌려온 개념이다. 무언가 잘못 배치된 것 같은 이 장치들은 얼핏 보면 오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그것은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 중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순간에 전혀 다른 맥락 안에서 동일하게 작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이 대답을 임권택의 전기로 덮어쓰고 싶지 않다. 그건 아무 해결도 아닐 것이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복수는 성공적이었다. 지원필은 진수왕이 여전히 천검을 지니고 있는데도 대결 끝에 죽이는 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진수왕과 결혼한 달래를 죽이는 데도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청이 죽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때 청은 이 대결 끝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용과의 싸움에서 죽은 것이다. 그는 죽기 전 끔찍하게도 용의 한쪽 손을 자르는 데 성공한다. 용은 이기기는 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다른 형제로부터 한쪽 손을 잃는다. 이제부터 용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형제를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 그 형제로부터 자신의 한쪽 손을 잃었다는 분노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청은 지원필과는 아무 사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청이 죽은 것은 지원필에게 어떤 감정도 끌어내지 않는다. 남은 또 한 사람. 쌍둥이의 어머니는 자신의 소원대로 복수에 성공하긴 하지만 자신이 한눈에 알아본 아들 청을 잃고 기꺼이 지원필에게 양보하기로 약속한 용은 살아남는다. 그녀는 분명히 지원필에게 약속했다. 만일 지원필이 대신 복수를 한다면, 그녀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용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다음 “당신이 어머니라는 사실도 비밀에 부칠 수 있겠소?”라는 지원필의 요구를 지키지 못했다. 그만 대결 중에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화가 끝난 다음이다. 용을 볼모로 지원필을 협박했을 뿐만 아니라 복수를 해준다면 자신이 용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용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지원필과 용, 그리고 용의 어머니가 무수한 시체를 뒤로하고 떠나가는 뒷모습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긴 하지만 이 장면 ‘이후’에 기다리는 것은 유사 가족의 성립이 아니라 이들 사이의 완전한 파국이다.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원한의 두 꼽추 스틸이미지
마지막 장면, 은실의 시선, 참혹한 쇼트들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신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pont_of_view)에 있다. 나는 아직까지 거의 이 영화의 서사에서 얼룩에 가까운 한 인물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건 진수왕과 달래 사이의 딸 은실이다. 은실은 지원필이 용을 풀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성을 찾아왔을 때 갑자기 등장한다. 그런 다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저 영화에 의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오로지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필과 용의 편을 들면서 아버지에게 자비를 요구한다. 나는 이런 장르에서 적의 딸이 갑자기 주인공 혹은 그이 아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순간을 수없이 알고 있다. 다만 이 서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계열의 탄생. 거기에는 예상치 않게 두 사람 사이에, 혹은 둘 중 한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여기엔 그런 코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은실은 용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하는 어떤 기호도 제공하지 않으며, 용은 그녀의 호의에 대해서 단 한 순간도 의심의 제스처를 보이지 않는다. 마치 그 둘 사이는 어떤 감정의 계산도 없이 휴머니즘이 요구하는 희생만이 있는 것만 같은 윤리적 행동을 한다. 그러므로 지원필과 용과 그의 어머니가 은실웰염≠랜옇泉飴句옅개ぐ?#영?사이에서 나눌 감정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임권택은 사실상 이 서사에서 완전히 외곽에 놓여있는 은실의 시선으로 어느 순간부터 이 마지막 신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이 시선의 논리에 아주 엄격하게 대응하듯이 차례로 쇼트를 소개한다. 그래서 구태여 서사의 관점으로나 혹은 감정선의 흐름에서나 아니면 리듬의 화음에서 무언가 불균질 하거나 불편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죽은 진수왕과 그의 아내 달래와 그 둘 사이의 아들의 시체를 은실의 시선으로 차례대로 보여준다. 세 개의 참혹한 쇼트. 딸이 바라보는 부모의 시체. 여동생이 바라보는 오빠의 시체. 그런 다음 떠나가는 지원필과 용과 그의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은실을 보여준다. 그때 우리는 은실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호의는 가장 나쁜 형식으로 돌려받은 것인가. 이 마지막 신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은실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장 불쌍한 사람의 시선.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가족 모두를 잃었으며 뿐만 아니라 성의 태수의 딸로서 안락하게 살아가던 삶 전체를 상실한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이 결말 ‘이후’에 복수를 맹세한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녀를 탓할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가면 즉각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한의 두 꼽추>는 아직 충분한 대답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표면의 설명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임권택의 이상한 계산법에는 어떤 메타 서사가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은밀하게 감춰진 네트워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계산법 아래 숨겨진 침묵은 무엇일까. 대부분 숨은 듯이 가려져 있다가 때가 되면 갑자기 나타나 셈을 치르기 시작한다. 나는 수없이 예를 들 수 있다. 이 계산법은 <화장>의 마지막 시퀀스에까지 이어진다. 김훈 작가가 미처 쓰지 않은 오상무와 추은주 사이의 마지막 작별인사. 그 이상한 작별의 방식, 이때 거의 대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선택의 전도가 있다. 여기에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있는가? 없다. 그러기는커녕 이야기를 더 이상 진행하는 것이 위태로울 정도로 어리둥절해진다. 기른 아버지 지원필은 용을 위해서 모든 희생적인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는 용이 자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마을에 내려와 소동을 벌인 끝에 진수왕에게 붙잡히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옛 원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해달라고 빈다. 달래가 황금불상을 훔쳐오면 교환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둑질을 오로지 용을 위해서 한다. 하지만 황금불상을 훔쳐오는 데 성공을 했음에도 진수왕은 교활하게 지원필이 그 과정에서 무공을 되찾은 것임을 걱정한 나머지 그의 한쪽 팔마저 잘라버린다. 하지만 꼽추에 한쪽 팔마저 잃은 지원필은 이 지경이 되어도 단 한 번도 용을 원망하지 않는다. 당신은 임권택의 계산법이 이 모든 우여곡절을 치르고 난 다음에 낳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제안이라는 것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 계산법은 어떤 법칙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간극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환상이 침입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때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여기서 환상이란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계산법이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현실에서 모든 계산법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수식화이다. 핵심은 이 계산법이 어떤 이득을 취하느냐가 아니라 이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임권택은 자신의 계산 과정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그때 진실이란 실재의 일부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계산속에서 우리는 임권택이 드러내는 진실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대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영화의 방법이란 자신의 계산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힘겹게 그 셈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용은 꼽추가 되고 한쪽 손이 잘려나가면서 기꺼이 그 계산의 미끼가 되었다. 나는 <원한의 두 꼽추>를 가혹한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점점 더 가혹해질 것이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맞을지도 모른다. 감정의 공포. 진실이라는 네트워크의 공포. 찢어진 네트워크 사이의 실재의 공포. 무엇보다도 방법의 공포. (계속) 



1971년 78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태창영화
각본  박철민
촬영  구문석

안길원
김택수
한숙
김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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