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무산일기
박정범, 2010
탈북자가 주인공인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무산일기> 역시 탈북자 전승철의 비루한 일상을 전시하며 시작한다. 요란하지 않게 덤덤히 그의 일상을 좇는 카메라의 시선은 무언수행에 가까운 승철의 수동적 태도와 맞물리면서 남한사회에서 탈북자가 차지하는 위치를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영화는 불과 10분을 채 넘기지 않은 시점에서 승철의 욕망 또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숙영을 훔쳐보는 승철의 관음증적 시선은 탈북자라는 사회적 위치와 무관한 개인의 욕망, 소심한 남자의 짝사랑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클리셰다. 상투적 묘사로 인해 승철의 욕망은 명징하게 전달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탈북자로 위치 지어진 승철의 일상을 좇는 시선과 보편적 개인으로서의 승철의 내재된 욕망을 좇는 시선의 양식이 똑같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철의 행적을 집요히 좇는 카메라는 그가 처한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정서를 자아낸다.
서글프다 못해 비참한 탈북자의 일상과 숙영을 향한 오롯한 승철의 욕망은 정비례 수준으로 내러티브를 교차한다. 영화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 찍힌 ‘125’라는 낙인 때문에 사소한 일자리조차 얻지 못하는 승철의 소수자적 모습과 짝사랑하는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변신을 꿈꾸며 양복점을 기웃거리는 보편적 모습을 동등한 위치에서 전시한다. 그러나 ‘꿈과 현실’이라는 이분법적 체계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던 승철의 행적은 숙영의 노래방에 취직하면서부터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탈북자의 비루한 삶과는 일말의 공통점이 없을 것 같던 숙영의 이미지(교회 성가대, 참한 외모, 나긋한 말투)는 승철의 타자화된 시선이 개입된 허상임이 노래방에서 낱낱이 밝혀진다. 승철이 자신과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챈 숙영은 자신이 노래방에서 일하는 것을 교회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성스런 공간인 교회에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편집증적으로 노력하는 숙영의 행동은, 탈북자의 고단함과 숙영을 향한 낭만을 부단히 구별하려는 승철의 모습과 닮아있다. 하지만 그렇게 고결함을 지키려는 노력은 세속적 공간인 노래방에서 항상 무화된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던 숙영은 가장 속물적인 방식으로 노래방 영업에 충실하고, 승철은 그런 숙영의 모순된 행동을 보면서 자신이 상정해놓은 편리한 이분법이 무너짐을 느낀다. 특히 승철이 도우미들과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은 ‘성/속’, ‘꿈/현실’을 철저히 구분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무의미한 행위인지를 극명히 드러낸다. 교회에서도 배울 수 없었던 ‘찬송가’를 처음으로 승철에게 가르쳐 준 존재가 ‘도우미’라는 사실과 그 모습을 본 숙영이 ‘도우미’와 ‘찬송가’를 함께 입에 담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 역정을 내는 순간이 연이어 연출되면서, 더 이상 이분법적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고 체득해야 할 모순만이 남게 된다.
숙영의 모순된 행동을 보며 거울처럼 내면의 분열증을 겪던 승철은 결국 마음속 깊숙이 묻어두었던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 고향인 북한 무산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고백은,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던 지옥에서 승철이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트라우마는 북한에서의 외모, 습관,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던 승철의 모습으로 표면화됐다. 육체는 남한에 있지만, 정신은 여전히 무산에 있는 것이다. 승철이 가장 숨기고 싶던 치부이자 분열증의 근원을 털어놓자, 역설적으로 꿈의 대상이던 숙영이 처음으로 승철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계기가 된다. 교회에서의 고백을 통해 모순적 존재임을 공인받은 승철은 숙영과의 관계 재개와 성가대 진입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그들에게 모순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자각의 문제였던 것이다. 지옥 같았던 북한에서의 트라우마는 극복이 아닌 모순의 인정을 통해 임시로 봉합된다.
그렇게 승철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채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처음으로 어엿한 남한사회의 일원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것들을 얻은 승철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정돈된 외모와 소속집단에서의 지위를 전시하는 장면은 오히려 탈북자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던 살풍경보다 더 스산하게 느껴진다. 비극적 파국의 복선처럼 느껴지던 스산함은 남한사회에서 승철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준 백구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백구의 죽음을 멍하니 바라보는 승철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무산의 현현이다. 임시 봉합된 트라우마는 재발하고 오히려 무산의 지옥도는 더 선명하게 그려진다. 승철이 백구의 죽음을 그냥 지나치는 순간, <무산일기>는 끝난다. 하지만 새로운 지옥으로 가는 승철의 ‘서울일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