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달에 부는 바람
이승준, 2014
<달에 부는 바람>은 주인공 예지의 엄마, 미영 씨가 쓰는 일기로 시작한다. 이 일기는 예지가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는지 꼼꼼하게 기록된 글이다. 예지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시청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예지의 엄마는 예지가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기록하고, 그걸 바탕으로 혹시나 눈치채지 못했을 예지의 언어를 발견하려 노력한다.
예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느낀다. 선풍기 바람에서 느껴지는 촉감만으로 몇 바퀴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꼭 넘어질 것만 같은데 넘어지지 않는다. 이 모습이 익숙한 일상인 듯, 춤을 추는 예지의 옆에서 미영 씨는 화분을 돌본다. 예지는 엄마의 화장품 냄새가 나면 외출준비를 한다. 예지를 데리고 나갈 때 미리 준비를 다 하는 엄마의 습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말을, 가만히 손을 대고 있는 목울대의 떨림으로 알아차린다. 하지만 예지가 정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감정들을 느끼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승준 감독의 전작 <달팽이의 별>에는 예지와 마찬가지로 시청각중복장애를 가진 영찬 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영찬 씨가 느낄 수 없는 시청각으로 이루어진 매체지만, 감독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영찬 씨가 겪는 세상에 대한 느낌을 효과적인 화면과 사운드를 통해 비장애인인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영찬 씨의 시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개였다. 예지는 그런 교집합이 없다. 점자도 수화도 없다. 자신이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보았던 세상을 기억하는 영찬 씨와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있는 예지는 또 다르다. 그런 예지와 세상의 교집합은 엄마다. 관객들은 엄마의 감정을 통해 예지를 바라본다.
한 인터뷰에서 미영 씨는, 세월이 정체된 것 같은 시간을 살았다고 했다. 아이들이 학생이 되고 성년으로 자라나는데 예지는 멈춰 서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같다고. 곧 성년이 되는 예지의 몸은 이제 엄마보다 커졌는데도, 예지는 여전히 아기처럼 엄마에게 폭 안긴다.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찾은 구청에서 지문을 찍을 수가 없어서 지문채취용 용지를 잔뜩 받아와 예지가 잠든 틈에 지문을 찍어야만 하고, 자신이 왜 아픈지도 모른 채 생리통에 괴로워하는 예지를 그저 안아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인물들에 집중한다. 지문채취의 목표를 달성하고 한참을 웃는 예지의 부모님의 모습,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언니, 같이 모여 앉은 밥상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당신 그릇의 만두를 모두 예지에게 넘기고 만 아빠... 그리고 예지는 그런 따뜻한 일상의 공기를 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마음에 남았던 장면은 미영 씨가 집안의 화분을 돌보고 정성스레 잎을 닦아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봄이 되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나에게 하룻밤이었던 어떤 시간 사이에, 꽃을 피우고 훌쩍 자라버리는 식물들. 나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자신들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많은 존재들. 이 영화는 어쩌면 지나쳤을지도 모를 순간들을 떠올리게 해 준다. 다른 언어를 가진 예지의 세상이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