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고재홍, 2016
<자기만의 방>(2013)을 통해 자신의 방에 있는 기억의 흔적들을 더듬고 방 벽에 프로젝션을 하여 세상과 만나던 고재홍 감독이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을 통해 방 밖으로 나왔다. 고정된 채 자신의 방 안을 탐구하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서울의 도심 속을 걸어 다니는 그의 손에 들린 채 세상과 만난다. 취업준비를 하며 오가는 길에 찍은 학원과 지하철의 풍경들, 퀴어페스티벌을 반대하며 울부짖는 사람들 그리고 경찰의 손에 들린 채증용 카메라. 그 속에 담긴 풍경들은 혼란스럽고 허무하기만 하다.
대학 시절 문학 교수님께 보내는 서간체 형식의 에세이 내레이션에서 감독은 “1920년대에 헤밍웨이는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사회와 인간에 의해 허무를 느꼈다면,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시대에 저는 왜 이렇게 허무한 감정이 드는 걸까요.”라며, 세상과 대면하며 느끼는 자신의 갑갑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1920년대 헤밍웨이의 세대가 느낀 허무와 2010년대 우리 세대가 느끼는 허무는 다른 허무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폐허가 된 풍경을 바라보아야 했던 그 시대의 허무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깨어진 후에 오는 환멸의 감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전후의 세계, 21세기 한국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대가 느끼는 허무는 그처럼 뚜렷한 계기가 없는 불명의 허무이다. 믿음과 기대가 깨어진 지 오래인, 이미 폐허가 된 세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허무. 이러한 감독의 마음은 그의 카메라를 통해서뿐 아니라 그가 꾼 꿈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취업에 실패한 취준생의 자살로 비칠까 걱정이었다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 망각에 저항하고자 하는 세월호의 싸움을 연상시키는 자신이 완전히 소멸되는 꿈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 아픈 어머니를 뒤로한 채 불꽃축제를 찍으러 나갔지만 불꽃이 터지지 않은 꿈. 이렇듯 감독은 혼란하고 허무한 세상과 그 풍경이 반영된 자신의 꿈들 사이를 헤맨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독에게 구원, 지도가 되어주는 것은 문학과 빛이다. 영화의 제목으로 빌려온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서 나이 많은 웨이터는 모든 것이 허무이고 인간도 한낱 허무에 지나지 않는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아늑하고 환한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라 말한다. 감독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이것들이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은 고립된 개인의 위로나 평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감독은 주인공 노인이 청새치, 상어와 외로운 사투를 벌이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며 지지 않겠다는 마음, 아직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남아있다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 역시 자신이 만들었던 영화 속 사랑했던 주인공들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주는 통로로서의 빛, 꿈속에서와는 달리 팡팡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들과 이를 보며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어떤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성호경을 긋는 조문객의 뒷모습이다.
취업준비학원이든, 퀴어페스티벌이든 어딘가로 들어가지 못하고 속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 부유하는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의 카메라는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현재 청년세대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동시에 카메라와 내레이션은 상기한 것처럼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허무와 아름다움을 분명히 구별한다. 또한 줌인한 보름달을 스크린에 가득 채움으로써 카메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영화의 엔딩으로 보여주며 무기력과 허무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는 청년세대에 대하여, 무기력과 허무에 고립되거나 혹은 공허하고 맹목적인 의지만 보여주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대부분인 요즘,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믿음과 의지를 놓지 않는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