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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범죄의 여왕

이요섭, 2016

[초이스]범죄의 여왕 대표 이미지

올해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 중 가장 좋은 인상을 받은 작품 중 하나는 이요섭 감독의 <범죄의 여왕>이었다. 싱거운 유머와 심각한 범죄가 공존하는 이 작품은 씁쓸한 현실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스릴러 장르의 클리셰가 적절한 조화를 이룬다. 또한 각자 고유한 개성을 부여받은 캐릭터들이 뛰어난 앙상블을 펼치고 고시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연출도 보는 즐거움을 준다. 여기에 박지영, 조복래, 허정도 배우의 연기는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확한 캐릭터 해석으로 이야기에 색을 더한다. 

이런 많은 장점 중 특히 좋았던 건 박지영이 연기한 미경의 캐릭터였다. 드센 ‘시골 아줌마’의 모습으로 등장한 그녀는 상투적인 ‘아들 바보’이자 ‘오지랖 넓은 아줌마’이지만 이야기의 진행과 함께 자신에게 덧씌워진 선입견들을 격파하듯 하나씩 깨나간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고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인물이지만 잘못을 인정해야 할 때는 바로 사과하고 물러설 줄 안다. 남의 사생활에 필요 이상으로 귀찮게 개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행동들이 타인의 상황에 대한 깊은 공감이 바탕에 깔려있음도 암시된다. 또한 비굴해 보일 정도로 아들의 뜻을 따르던 미경이 처음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는 어떤 쾌감까지 만들어낸다.

더구나 이 모든 사건을 겪은 후에도 미경은 어떤 엄청난 심경의 변화를 겪은 사람처럼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원래 삶으로 바로 돌아간다. 즉 영웅 흉내를 내지도 않고 ‘변호사 자식을 둔 엄마’로서 다른 삶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해 미장원에서 친구들과, 애인과 수다를 떨며 살아간다. 주인공이 어떤 큰 사건을 겪은 뒤 새로운 인물로 태어나는 건 물론 매력적인 서사이지만 <범죄의 여왕>의 미경은 지금까지 열심히 만들어온 자신의 삶에 굳이 큰 변화를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사흘 동안 겪은 비일상적인 사건 하나로는 그녀의 단단한 일상에 균열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평범한 생활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긍정적인 기운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드물고 귀한 존재로 느껴진다.

게다가 미경은 ‘엄마’라는 하나의 역할에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복수의 정체성을 순간순간 만들어나간다. 미경은 개태(조복래)와 있을 때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성숙한 여인이며, 고시원 사장이나 폭력 남편과 맞설 때는 프로페셔널한 싸움꾼이다. 그런가 하면 진숙(이솜)과 대화할 때는 나이를 잊은 좋은 친구처럼 보이고 덕구(백수장)를 바라볼 때는 마음 따뜻한 선배처럼, 자식을 찾는 다른 어머니를 도와줄 때는 남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또 한 명의 어머니로 보인다. 한 명의 사람이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이지만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영화 속 캐릭터를 통해 재확인하는 경험은 의외로 감동적이다. 자신의 원래 성격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연하고 능숙하게 제 역할을 바꿔나가는 미경은,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정말 존경할만한 어른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범죄의 여왕>은 미경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에 힘입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나아가 연쇄 살인이라는 소재 속에서 웃음의 순간을 만들어내고 최소 여섯 명 이상의 캐릭터를 동시에 다루어야 하는 숙제를 풀면서 이런 흥미로운 인물을 만드는 데 성공한 이요섭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다. 단순하고 명쾌한 인물을 제시하면서도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이야기 구성과 연출은 분명 주목해야 할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요섭 감독의 다음 영화가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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