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스틸 플라워
박석영, 2015
몇 해 전 덩치 좋은 한 감독이 <들꽃>이란 영화를 들고 나타났다. 완성도는 상당히 거칠었지만 가출 소녀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분명한 작품이었다. 거리의 소녀들은 작은 방을 얻어 함께 살 궁리를 하면서 잠시나마 행복한 꿈을 꾸지만, 세상은 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다. 세상을 알기도 전에 생존의 악다구니에 내맡겨진 소녀들.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녀들은 겉으로 보기에 비행청소년이며 잠재적 범죄자들이다. 동시에 상시적으로 범죄에 노출돼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소녀들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로한다는 명분만으로 소녀들의 이미지를 착취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감독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버려진 소녀들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흔히 범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들꽃>은 그런 지점의 경계에 서 있는 영화였다. 그들의 이야기와 이미지에만 지탱하지 않고 위태로운 줄다리기 하며 삶의 고통을 드러내는 긴장이 보여졌다.
박석영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들꽃>의 프리미어 상영을 마친 감독은 다시 한 번 소녀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한다. <들꽃>의 막내였던 하담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부산에서 시나리오의 초안을 잡고 곧바로 헌팅을 해서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가 <스틸 플라워>다.
전작 <들꽃>에 비한다면 드라마는 없거나 단순해지고, 이미지는 단단해졌으며 카메라는 소녀에게 조금 더 밀착해 있다. 카메라는 하담을 쫓기만 할 뿐 카메라 안에 옭아매지 않는다. 더욱 단출하게 하담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소녀의 속마음을 온전히 전달받기 어렵다(혹은 어렵다고 느껴진다). 하담의 상황을 고통스럽게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하고 싶어요.” “돈 줘!”. 정도를 제외하곤 그녀는 독백조차 하지 않는다. 혼자 생활해서 말을 잃어버린 소녀. 누군가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아 본 적이 없는 하담. 더불어 우리는 하담의 표정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런 면이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답답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하담이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였다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들꽃>에서 허황돼 보이지만 방을 얻어 살 계획을 세우던 소녀들의 모습과는 매우 다르다. 대신 하담은 탭댄스를 한다. 하담은 꼬깃꼬깃 돈을 모아 탭댄스 신발을 구해와 거리에서 행복하게 탭댄스를 춘다. 중요한 것은 하담이 신발을 훔치지 않고, 꼬깃꼬깃 모은 돈을 신발장에 놓고 신발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행복한 순간은 잠시. 세상은 한 번 더 그녀를 버린다. 거리에 내동댕이쳐진 하담의 모습. 그녀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파도와 맞선다. 어쩌면 마지막 장면을 위해 영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끝에 가서야 하담의 표정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위안을 받는 것 같다. 그녀를 위한 위로가 아니라, 그녀를 통해 내가 위안을 받은 느낌이다. <스틸 플라워>는 2016년 4월 7일 전국 극장에 개봉했지만 관객으로부터 외면받았다. 아니 버림받았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독립영화엔 너무 흔한 일이라서 끄집어 얘기하기도 그렇다. 영화제에서의 수상으로 화제가 되고, 정하담의 연기가 인구에 회자되었기에 작은 기대를 했지만, 여지없었다. 관객들은 흔들리는 카메라 속의 하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관객들의 선택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영화를 만들고 있는 박석영 감독과 여러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작은 응원을 보내고 싶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어설픈 응원보다는 한 명의 유료 관객이 그들에겐 소중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