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공동정범
김일란,이혁상, 2016
이제 막 세상에 나온 <공동정범>에 대해 벌써 말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한국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극찬을 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아슬아슬한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염려와 불안을 동시에 내비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진상규명은 어디로 갔냐고 묻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카메라 앞에 선 인물들을 염려한 나머지 윤리를 논하기도 한다. 나는 이 작품이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간 것을 염려하기보다 무척 환영하지만, 그 논쟁의 한 편에 서서 논의를 거들고프지는 않다. 물론 이미 이 작품을 소개하는 최초 두 공간에서 적극적인 지지자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논쟁들을 지켜보는 와중에 문득 이 작품이 가진 무게감을 공적 담론에서 조금 벗어나 개인의 성찰적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어떨까 싶기 때문이다. 다소 사적인 용어 ‘외로움’과 ‘불안’을 키워드로 빌어 말이다.
영화는 7년 전 발생한, 용산참사 이후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로 형을 살고 나온 철거민 다섯 명의 오늘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용산참사를 전경의 목소리를 경유해 풀어낸 전작 <두 개의 문>에서 공백으로 남겨둔 철거민의 증언을 이 작품은 집중적으로 풀어낸다. 그러나 영화는 당시 공백을 메워내면서 사건의 진상규명으로 돌진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진상규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프레임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증거로서 철거민의 말을 정보로 제한하지 않고, 말 되어지지 않는 의미로서, 감정으로서 포착해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사람을 읽어내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 대면은 곧 나와의 대면으로 이어진다. 이름하여 우정의 문법이다. 타자를 나와 닮은 벗으로 상상하며 이해와 공감을 이뤄낸다.
“외로웠어요.” 영화 초반에 화면 가득 울먹이면서 천주석 씨가 말한다. 방 안 가득 화분을 채우고 있는 김주환 씨도, 신앙의 힘으로 버티는 지석준 씨도, 아내의 병간호를 하는 김창수 씨도, 빈 컵을 들이키며 시종일관 쓴웃음을 짓는 이충연 씨도 각기 다른 언어로 외로움과 두려움을 말한다. 투쟁 이후 오늘, 남겨진 삶의 차가움과 무거움에서 시작한 영화는 ‘외로움’을 가득 묻어내고 있다. 이들의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지표인 동시에 열정과 무관심 사이에 놓여있는 불안의 표식이기도 하다. 또한 외로움은 역설적으로 누군가를 부르는 신호이기도 하다. 타인과, 세계와의 연결, 공시적 이야기를 공유하는 공동체에의 소속 여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한 것이다.1) 실제 영화는 각각의 인물들을 개별적으로 담아내고 있지만, 이들을 영화적으로 이어내고 있다. 조각난 기억을 맞추고 각자 감정들을 서로를 향해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들의 외로움은 궁극적으로 공동, 공동체의 잔여이자 이면이자 절규이다.
영화는 이처럼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자 상실감을 외로움으로 드러내는 한편 공동체 내부의 균열을 용기 있게 담아낸다. 90년대 후일담이 상실과 환멸의 서사를 통해 정치적 실패나 무능력으로 빠졌다면, <공동정범>은 후일을 이야기하지만 그 자체를 현상이 아니라 원인으로 짚고 파고든다. 이들의 상실감과 외로움은 섭섭함과 분노로 치닫다, 자책감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이 국가폭력의 일환임을 차분하게 짚어낸다. ‘공동정범’, 여기서부터 출발이었다. 영화 제목이자 이들 죄명인 공동정범은 ‘공동’의 역설로 돌아온 셈이다. 말도 안 되는 판결을 받아버린 개인들은, 판결을 재고할 여지도 없이 형을 살고 나오면서 말 못할 오해와 외로움이 쌓여간다. 그러나 돌아보면 남 탓만큼이나 내 탓도 많은 법, 영화는 이로 인한 불안감까지 가중되면서 서로 흩어지고 와해된 모습을 차분하게 드러낸다. ‘공동정범’의 의도이자 목적이고 이것이 바로 국가 폭력의 민낯인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상실감과 균열을 감추기보다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망루 내부의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면서 각 인물들의 말 속에 놓인 희미한 떨림과 요동을 섬세하고도 가깝게 포착하고, 관계와 힘들의 파동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궤적들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들의 외적 갈등만큼이나 내적 갈등을 같이 마주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동지를 죽이고 경찰까지 죽였다’는 판결에 대해 할 수 있는 각.자. 최선을 발버둥 치며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균열의 표면보다 그 근원에 대해 조금씩 접근해간다. 그리고 질문한다. 왜 이 같은 외로움이, 그로 인한 균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영화는 차츰 함께함과 부대낌이 공존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라는 당연한 그러나 다소 낯선 접근을 통해, 부대낌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어떤 미정형의 힘으로 부대낌을 읽어내는 것이다. <공동정범>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축으로는 (인물의) 기억과 (매체의) 기록을 교차해 그날의 진실로 다가가려 하고, 다른 한 축으로는 공동정범으로 몰린 이후 지금 ‘우리’의 분열된 모습을 차분하게 짚어가면서, 아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부대낌의 상태를 전면화하면서 국가 폭력의 민낯을 그 자체로 목도하는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영화를 보고 공동체 내분을 말한다거나 누군가를 비판하는 작품이라고 본다면, 이는 이 작품을 지극히 일차원적으로 접근한 것일 테다. 사실 영화는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지만 용산참사라는 사건에 갇히지 않고 재난 시대에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아니 나에게 말을 건네는 영화이다. 각각의 인물들의 내밀한 자기 속내는 결국 나 자신을 건드리고 물음을 던지게 한다. 살아남은 이들의 외로움과 불안을 마주하면서, 이들을 나의 외로움과 불안을 닮은 친구로서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타자화나 무심함을 벗어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진상규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자 바른길이 아닐까. 논의를 거들지 않겠다고 하면서, 결국 논의를 거들어버린 꼴이다. 내 글의 균열(!)이다.
1) 권명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 한국 사회의 정동을 묻다」, 갈무리 책 일부를 참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