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이스]소나기

안재훈, 2016

[초이스]소나기 대표 이미지

애니메이션 <소나기>는 참 의외의 작품이다. 원작인 황순원 작가의 동명 단편 소설 「소나기」가 오랜 시간 교과서에 실렸던 만큼 그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안재훈 감독과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는 이 유명한 한국 근대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소설의 문장과 행간의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케 한다. 무엇보다 첫사랑의 원형과도 같은 소년 소녀의 서정이 어떤 형태였는지,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목격하는 기쁨을 준다.

도시에서 전학을 온 병약한 소녀와 무뚝뚝이 시골 소년이 개울가에서 마주친다. 둘은 몇 번을 마주치고도 인사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다가 소나기가 내리던 어느 하루를 온전히 함께 보낸다. (소설을 읽을 때도 깨닫지 못했던 이 사실을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실감했다!) 산과 들을 쏘다니던 두 아이는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 때문에 서로에게 부쩍 가까워진다. 그날 이후 소년은 소녀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며칠 만에 핏기없는 얼굴로 개울가에 나타난 소녀는 곧 이사를 가게 됐다며 아쉬워한다. 설상가상, 소년은 어느 밤 부모님의 대화 속에서 뜻밖에도 며칠을 앓다가 변변한 약도 써보지 못한 소녀의 죽음을 알게 된다. 소년 부모님의 대화로 끝나는 소설 「소나기」의 엔딩은 이렇게 충격적이면서도 시적인 여운을 남기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소나기>는 그 여운을 소중히 다루면서 소나기처럼 스쳐 간 그 시절의 어떤 마음을 더해 그렸다는 점에서 놀랍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 억새풀밭 사이에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이 엔딩을 장식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문장에 지혜로운 상상을 더한 셈이다. 황순원 원작의 표현처럼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던’ 소녀 때문에 가슴 떨렸던 기억을 어렴풋이 간직한 소년. 그래서 소녀를 떠올리면 드는 감정에 제대로 이름 붙여볼 겨를도 없었던 소년의 마음이 억새풀을 스치는 바람을 따라 스크린에 번진다. 

엔딩만이 아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애니메이션 <소나기>는 그렇게 아직 설익은 소년 소녀의 마음을 담는다.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는 소년에게 “이 바보!”하고 조약돌을 던지는 소녀의 모습이 보이고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릴 때, 그 시절의 어떤 감정은 아주 선명하게 다가온다. 사랑스럽게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 부드럽게 흔들리는 들꽃, 학교 종이 선명하게 울리는 운동장과 교실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그 감정을 증폭시킨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장면에서 소년과 소녀는 주인공인데도 크게 그려지지 않는다. 어떨 땐 풍경에 묻혀 있다. 소년과 소녀의 모습보다 하늘의 구름, 다양한 꽃과 나무, 개울물의 반짝임이 훨씬 자주, 훨씬 디테일하게 등장한다고 느껴질 정도다. 누군가에게는 자칫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 도전적인 연출은 애니메이터로서 안재훈 감독이 추구해온 지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소나기>는 표면적으로는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듯하지만 실은 이 땅에 태어나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어린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지녔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에 대한 부담을 안고 만든 이 작품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순간 스쳐 가는 소중한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삶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안재훈 감독은 이전에도 한국 근대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왔다. <메밀꽃(필 무렵- 이효석), 운수 좋은 날(현진건), 그리고 봄봄(김유정)>이 그 시작이었다. ‘시즌 2’에 해당하는 <소나기>는 여름의 끝자락에 개봉해서 기대만큼 많은 관객과 마주하진 못했다. 국내 극장 환경에서 <소나기>의 개봉은 여러모로 도전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다양한 공동체 상영을 이어가고 있는 이 작품의 정성만큼은 많은 이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