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그녀에게
김성호, 2010
조너선 캐럴의 『웃음의 나라』는 마셜 프랜스라는 동화작가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 남녀 한 쌍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던 작가가 평생을 보냈던 마을에 도착하지만, 곧 그 마을의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된다. 꽤나 충격적인 반전과 장면이 포함된 이 소설을 읽고, 허구의 창작이야말로 신의 천지창조를 흉내낸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창세기에서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고 생령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모든 창작자들도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의 소소한 설정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 환경, 그리고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에 반영하면서, 점차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의 물리적 세계를 꼭 닮은 허구의 세계가 형태를 갖게 된다. 그러나 어떤 창작자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캐릭터를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끌고가지 못하게 된다. 대신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들이 스스로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행하는 선택들을 그저 뒤좇게 된다.
그러고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언어’의 흩어짐으로 끝을 맺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후대의 신학자들은 바벨탑 이야기를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들’에게 신이 내린 징벌로 해석한다. 그리고 테드 창 같은 작가는 오히려 “신을 경배하고자, 그래서 신을 닮고자 만든 것”이라는 전복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물론 나는 테드 창의 해석이 좀더 마음에 든다. 나아가 바벨탑이 그저 높이만 높은 탑일 뿐 아니라, 실은 소설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인간 복제나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보다도, 허구의 창작야말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모방 행위라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재능이 있든 없든, 사춘기 적 한번쯤은 소설 습작을 해보고, 고통과 무력의 시기에 한번쯤은 시나리오를 써볼 궁리를 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성호 감독의 영화 <그녀에게> 역시 허구를 창조하는 창작자의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배우 미팅을 위해 부산에 내려가는 한 영화감독과, 실명(失明)을 앞두고 오래 전 버린 딸을 찾아가는 중년의 사진가를 교차하며 시작한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를 고쳐쓰다 부산의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묘령의 신비로운 여자와 만나 그녀와 동행하게 된다. 한편 전화번호가 적힌 낡은 사진 한 장만을 들고 딸을 찾는 중년 남자는 필사적으로 딸의 행방을 좇지만 좀처럼 그녀를 만날 수 없다.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평행하게 달리며 서로 교차되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엮이기 시작한다.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여자가 들려주는 사연을 자신의 시나리오에 반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여자의 사연이 밝혀질수록, 초반에 제시됐던 영화감독의 사연이 하나씩 거짓으로 판명될수록, 영화 안에서 이야기와 현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일 뿐 아니라 시간까지 뒤섞인다. 주인공인 영화감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인 채 한 영화 안에 여러 개의 이야기로서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러 개의 이야기가 다시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그녀에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시나리오를 쓰던 영화감독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여자를 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결국 창작자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주인공을 붙잡는 장면으로 판명난다. 자신이 피조물에게 그런 고통과 상처를 주었고, 그 자신이 그녀가 사고를 당하도록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나 그녀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아니 그가 그 장면을 쓰던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깜짝 놀라 키보드를 내던지고 이야기 속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이건 뒤집어 말하면, 결국 고통과 눈물의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의 상처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인 되는 셈이다. 어쩌면, 인간을 연민한다는 신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제가 만들고 제가 안겨준 고통이면서, 막상 그 고통에 힘겨워하는 인간을 보면서 연민과 고통을 경험하는 것일까, 신이란 존재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신이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흩뜨려놓긴 했으나 문학을 포함해 허구 자체를, 나아가 예술 자체를 파괴하지 않은 이유가 무얼까에 생각이 미친다. 신을 닮고 싶어하는 인간의 그 가련한 욕망에 결국 연민을 품어버린 것일까. 이 세계를 창조한 자신들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니 그냥 관대하게 굴자고 마음먹어서인 걸까. 혹은, 인간이 허구와 예술을 즐기다가 어느 순간 신을 이해하는,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의 순간을 맞기에 그냥 고이 내버려둔 것일까.
그런데 김성호 감독은 이 영화를, 애초에 시나리오가 없는 상태로 일단 찍어놓고 나중에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짜맞췄다고 한다. 어쩌면 신도 이 세상을 만들 때 실은 아무 계획없이 창조의 욕구 때문에 무작정 만들고 본 게 아니었을까 싶다. 완벽한 조물주가 만들었다고 하기엔, 빈 틈이 너무 많은 우리 세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