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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설화

김윤식,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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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눈 이야기’라는 제목에서 짐작이 가능하듯, 눈 쌓인 겨울의 산과 거리와 지하도를 헤매는 영화다. 우리의 현실 세계에선 이미 봄이 오고 황사와 미세먼지로 얼룩졌건만, 이 영화 속의 겨울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눈이 스크린 너머 우리 현실의 온도까지도 확 낮추는 느낌이다. 아직 칼바람이 불고 눈이 그대로인 한겨울의 고시원 쪽방,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고 외풍이 무섭게 파고드는 이곳에서 남자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홀로 이곳저곳을 떠도는 중년 남자의 흐트러진 삶이 방 곳곳에 배어 있다. 어울리지 않게 뽀로로 인형과 장난감들이 있다. 

영화는 별다른 설명 없이, 최소한의 힌트도 주지 않은 채 이 남자가 가는 발걸음을 그저 묵묵히 뒤따른다. 그는 일용직을 알선해주는 직업소개소에 가기도 하고, 경찰에 한곳에 모아둔 노숙인들이 쓰던 종이박스를 경찰과 실랑이 끝에 가져가기도 한다. 교회 봉사를 하고 있는, 아내로 짐작되는 여인과도 짧게 스친다. 말없이 돌아서는 그에게 아내는 만 원짜리 한 장을 챙겨줄 뿐이다.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어린아이의 아빠로 호명되는 그의 삶은, 그러나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남편이나 아버지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삶을 완전히 내팽개쳐버린 채 세상을 그저 부유하는 듯한 이 남자가 어떤 사연으로, 왜 그렇게 방랑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빚을 졌나? 죄를 지었나? 도망자의 몸인가?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나? 큰 상처를 받았던가? 아니면 그저 정착할 수 없는 방랑벽을 가진 사람인가? 우리는 그저 추측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그 추측에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그저 이 남자가 발길을 놓는 대로, 그리고 카메라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남자의 발길이 어느 무덤에 다다른다. 무덤 앞에 소주병을 놓고 절을 한다. 짧게 울음을 토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섣불리 그에게 감정 이입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여전히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이 울음소리마저 짧게 끊어버린다.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저렇게 삶을 방랑하는 이도 누군가의 죽음을, 기일을 챙기는 것인가. 심장 깊은 곳에서 토해내는 울음에 서린 저 한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이 남자의 사정을 그 어느 하나 알지 못하면서도, 남자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는 장면에 이르면, 어쩌면 이 영화가 시작된 순간부터 이 선택만큼은 우리가 어렴풋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누군가 이 세상을 스스로 떠나려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은, 그게 아무리 영화 속의 ‘연출된’ 장면이라 하더라도 마음 편히 볼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린 채 실눈만 뜬다. 게다가 감독은 잔인하게도, 이 장면에서 검은 무지의 화면을 삽입한다. 스스로 선택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질긴 목숨의 발버둥 치는 소리, 실제로는 5초 남짓이지만 가슴이 옥죄어 오고 숨쉬기가 힘든 긴 시간. 

이 순간에 대해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관객인 우리가 화면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순간, 세차게 가슴이 뛰며 낮은 비명을 낼 수밖에 없고, 천우신조의 ‘요행’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이 순간, 그렇게 바란 요행이 화면에 일어나 겨우 안도하게 되는 이 순간 말이다. 그의 ‘선택’은 좌절당했고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좌절에 안도한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한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삶은,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은 만큼 고통스러운 종류의 것일 게다. 우리는 그의 선택을 눈앞에 보며 그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없어 공연히 손을 움찔한다. 그의 시도가 좌절됨으로써 삶이 그에게 좀 더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어 그저 요행만을 바랐듯, 그에게 다시 주어진 삶을 우리가 도울 방법은 없다. 그의 까닭 모를 절망은 곧 우리의 ‘또렷한 한계가 있는’ 절망이 된다. 그런데 같은 산 저쪽에서 목을 매려 하는 청년을 발견하고 그가 달려갈 때, 방금 전 무력의 순간은 정확히 반대로 뒤집힌다. 그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는, 그 청년을 위해 그가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본다. 여전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대신 그를 응원할 수는 있다. 그가 있어 다행이다. 두 명의 목숨이, 마지막 순간에 삶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런 장면들이 우리에게 강하게 상기시키는 기억이 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의도 역시 바로 그것이다. 감독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마지막 자막을 통하여 또렷하게 강조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들을 그저 무력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들, 여전히 슬픔과 고통이 계속되는 우리 현실의 그 시간들이, 이 영화를 통해 다른 형식으로 반복된다. 영화 속에서 아이를 잃고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던 아비가 다른 청년을 구했듯, 현실에서 우리 역시 가족을 잃은 그들을 구할 수, 아니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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