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경주여행
김지현, 2010
한국 최초의 디지털독립장편 애견영화 <뽀삐>를 기억하시는가. 또는, 2009년 잔잔한 화제를 일으켰던 다큐멘터리 <앞산전>을 들어보셨는가. 그것도 아니면 <웃음><연애에 관하여><바다가 육지라면> 등 관계의 유희적 속성에 대한 단편 3부작을 아시는가?
농담이다. 저 앞의 진술들이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김지현 감독의 작품들에는 저런 거창한 수식 - 무슨 관계 3부작이니, 한국 최초니, 화제작이니 - 을 붙이는 게 머쓱하다. 플롯은 있지만 고지가 높지 않고 스토리는 있지만 훅에 온 힘을 걸지 않는다. 나름의 전언은 있지만 절실한 방백이라기보다는 긁적거리며 ‘너도 뭐 그런 거 있잖어’ 하는 독백에 가깝고 (실제로 이 감독님이 어느 무대에선가 수상 소감을 말하며 그 정도 톤과 매너로 중얼대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름 컷을 나누지만 굳이 그 구조 속으로 유혹하려는 것 같지도 않다. 먹을 땐 심심한데 나중에사 땡기는 평양냉면의 맛이랄까. 평수를 넓히고 분점을 내는 기업형 냉면집이 아닌, 그냥 어느 골목의 아는 사람만 아는 가게로 남는 데 개의치 않는, 무슨 ‘방망이 깎는 노인’ 마인드.
대단한 고백은 아니지만, 영화라는 매체장르를 지망하지도 그닥 애호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지금 각본도 쓰고 스탭들도 건사하게 된 계기에는, 영화사의 걸작이나 상당한 견적의 영화에 압도된 때문보다는, 화면은 거칠지만 분명 정서적인 순간을 제공하는 ‘한국독립 (필름도 아니고) 비디오’ 들의 영향이 큰데 그 중 특히 ‘레퍼런스급’의 소품을 꾸준히 선보인 분이 김지현 감독.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르는 아티스트 백현진이 나와 심상스레 라면 레시피를 선보이고 (바다가 육지라면), 배우인지 일반인인지 가늠이 안 가는 여성 셋이 모여 앉아 조곤조곤 30분 넘게 대화만 나누고 (연애에 관하여), 강아지가 가정 내에서 차지하는 권력 위상에 관한 썰을 진지하게 풀어나가고 (뽀삐) 하는 씬들을 인디포럼 등의 독립영화제를 통해 구경하며 ‘이거 봐라, 의외로 재밌는데, 근데 나도 만들 수 있겠는데’ 라며 희한하게 고조됐던 기억.
이 분이 2010년 오랜만에 극영화 신작을 가지고 나타났다. 제목도 <경주여행>. 지난번에 소개했던 <거짓말>이 서간문의 느낌이었다면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영상으로 만들어진 짧은 기행문. 공교롭게도 인디포럼 기간 동안 <경주여행>과 같은 섹션에서 상영됐던 단편 <개를 키워봐서 알아요>의 이우정 감독이 경주를 여행하는 여학생으로 나와서, 특유의 ‘볼부터 지레 웃는’ 비전문 연기를 선보이고 (근데 이 어색함이 캐릭터랑 맞는다) ‘돼지와 셰익스피어’라는 단편으로 알려진 김건 감독(‘약탈자들’ ‘동결’ 등의 독립영화에서도 존재감 있는 단역으로 출연했던)이 경주여행길에 마주친 의외의 훈남으로 출연해 꽤 안정된 연기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단편영화의 히로인 이채은 양이 극 초반 단독 여행을 부추기는 주인공의 친구로, 대구 경북지역의 독립영화‘통’인 남태우씨가 여정에서 마주치는 비호감남으로 한 단락씩을 책임진다. 보는 내내 신난다, 재미난다, 어른을 위한 소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