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보물섬
데자키 오사무, 1987
<보물섬>은 지금까지도 데자키 오사무가 연출한 역대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TV 애니메이션으로, 당시 후지 TV의 경쟁 프로(똑같이 매주 일요일 저녁 시간대에 방영)였던 `니폰세계명작극장` 시리즈가 원작을 충실히 옮겨냈던 경우라면 데자키 오사무의 <보물섬>은 감독에 의해 원작이 얼마나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제시했던 작품이었다. 일찍이 데자키 오사무가 생명력을 부여했던 캐릭터들은 만화(혹은 소설)가 만화영화화 되면서 보여지는 단순히 움직인다는 개념의 애니메이션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스스로의 의지까지 함께 불어 넣어왔다. <에이스를 노려라!>의 오카 히로미, <내일의 죠>의 야부키 죠, <집 없는 아이>의 비탈리스 할아버지, 그리고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운명을 거슬러 스스로의 삶의 이유를 찾으려 했던 캐릭터들로 원작에서 보여진 이미지들이 몇배는 증폭되어 애니메이션 속에서 더욱 강한 잔상을 남겨 놓게 된다.
데자키 오사무의 다음 타겟은 존 실버라는 남자였다. 스티븐슨 원작의 <보물섬>에는 단지 해적의 신분을 숨기고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는 전형적이고 악당스런 이미지의 실버가 등장한다. 하지만 데자키 오사무는 이 캐릭터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악역이지만 카리스마가 살아있고 해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인간적인 캐릭터로 실버를 재창조해 낸다. 그 결과 일본 애니메이션사에 어쩌면 가장 특별한 유형의 캐릭터가 창조되게 되는데, 이전까지 애니메이션들의 주인공은 하나 같이 어린이였다. 심지어 단순히 상상해 봐도 아무나 조작할 수 없어 보이는 그 복잡한 거대 로봇의 조종사들 조차 대부분 어린이이거나 청소년 연령 이상을 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린이에게 주인공을 빼앗긴 애니메이션 속 어른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비중적으로도 조연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애니메이션 속 어린이 주인공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은 대개 사욕에 눈이 먼 추악한 얼굴들로 묘사된 경우들이 많았다. 심지어 가장 현실적인 애니메이션 속 어른상을 보여주었다는 <기동전사 건담>의 브라이트 노아 조차 아무로 레이의 눈에는 한심한 기성세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이러한 어른들의 모습들 때문에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회적 편견(어린이들만의 전유물)의 벽이 오랜 기간 허물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보물섬>의 외다리 해적 존 실버라는 캐릭터는 너무나도 달랐다. 물론 그 역시 껍질 안에는 악을 품고 있는 캐릭터였지만, 적어도 짐 호킨스의 눈에 실버는 동경의 대상이자 나중에 커서 자신이 되고 싶은 남자의 모습으로 비춰 진다. 주인공 짐의 그러한 바람은 시청자들에게도 똑같이 전달 되었고 이는 이전까지 어린이 주인공에게만 거의 일방적으로 할애되었던 캐릭터의 성격 배분 판도를 뒤집어 엎는 매우 의미있는 표본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데자키 오사무의 캐릭터 성격 배분은 실버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물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캐릭터들에게 하나하나 성격을 만들어 나누어 준다. 리브시 선생과 스몰렛 선장과 같은 인물들은 물론 해적이었지만 변심해 아군이 되는 그레이 같은 캐릭터는 조연임에도 방영 당시 실버 만큼의 지지를 받게 되며, 그밖에 검둥개, 키잡이 한스, 앤더슨 갑판장, 갈매기 빠삐 등 어느 한명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이들은 분명한 성격을 부여 받은 캐릭터들이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성우들의 호연까지 더해져 데자키 오사무의 <보물섬>은 진정한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영상미를 담보해 주고 있는 것은 데자키 오사무 특유의 스타일쉬한 연출과 그의 명콤비 스기노 아키오의 작화력. 결정적인 순간에 화면이 정지 화면으로 바뀌는 하모니 기법의 완성자 미술감독 코바야시 시치로, 그리고 하모니와 함께 데자키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입사광 기법의 창시자 촬영감독 타카하시 히로카타의 황금 조합에 의해서 TV 시리즈임에도 매우 높은 퀄리티를 유지해 냈다.)
데자키 오사무의 <보물섬>에 대한 재해석은 최종회에서 최고의 빛을 발한다. 원작에는 없는 10년 후의 짐과 실버의 재회 장면을 에필로그로 추가한 것이다. 성인이 된 짐을 모른 척 외면하며 술집을 나가 버리는 실버. 더이상 그의 눈에는 꿈이나 미래의 빛을 찾아 볼 수 없는, 그저 늙고 병약한(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실버는 기합을 넣어가며 힘차게 말한다. 마치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짐에게 말하듯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늙은 앵무새 플린트에게 다시 한번 날아 보라고 힘주어 말한다. 어디에 가더라도 어떤 일과 맞부딪치더라도 그런 마음만 있으면 우린 아직 얼마든지 날 수 있다고 의연하게 웃으며 실버는 마지막에 짐을 돌아 본다. 마치 저 마지막 한 커트를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엄청난 감동의 잔상.
변하지 않았어. 나의, 나의 실버는!
제목: 보물섬
제작년도: 1978년
감독: 데자키 오사무
목소리출연: 와카야마 겐조(박상일), 시미즈 마리(김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