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길
배창호,2004
대장장이 태석(배창호)이 20년 넘게 무거운 모루를 지고 전국 장터를 떠돌며 사는 건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의 생계는 대장장이다. 칼을 만들고 다듬고 갈고 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고달프고 각박하며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지만 그걸 그는 그다지 창피해 하지 않는다. 자기 일로 자신만큼은 왜소해지지 않는다. 그의 표정엔 왠지 모를 사연이 읽힌다. 그가 장터를 떠돌아다니며 사는 건 무엇인 가를 버리고, 잊고, 내려놓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어느 날 다음 장터를 위해 길을 재촉하던 태석은 폭설로 버스가 끊긴 시골 검문소에서 빨간 코트에 스마일 배지를 단, 기이하면서도 앳된 외모의 처녀 신영(강기화)과 마주치게 된다. 그게 화근이 된다. 태석은 그녀가 옛 친구 득수(권범택)의 친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곤 과거라는 블랙홀로 급격하게 빠지게 된다.
배창호 감독의 2004년 작 <길>은 영화 만들기에 있어 작가적 고집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명백하게 페데리코 펠리니가 1954년에 만든 동명의 작품을 연상케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이건 펠리니에 대한 배창호식 오마주일 것이다. 혹은 배창호 스스로 펠리니 같은 우직스런 예술영화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의 확인일 수도 있다. 때론, 아니 자주, 영화작가들의 이 같은 순혈주의적 고집은 대중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는다. 대중들은 예수의 말처럼 ‘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모르오이다’로 살아갈 뿐이다. 그게 바로 관객의 속성이다.
이 영화 <길>은 5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져 모든 제작이 완료된 후 3년이 지난 2007년이 되어서야 공개됐다. 안타깝게도 거의 단관 수준으로 개봉돼 결국 배창호의 다른 여러 독립영화들과 함께 ‘저주받은 걸작’이 되고 말았다. 영화 안을 들여다보면 점점 더 외골수의 길을 가려는 작가의 마음, 그럼으로써 비록 독야청청일지라도 점점 더 상업주의에 빠져드는 작금의 영화계 대해 거칠게 항변하려 하는 작가의 외침 같은 것이 느껴진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배창호는 당시 광야에 있었던 셈이다. 그곳에서 그가 외치는 소리를 우리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후회막급의 일이 아닐 수 없다.
배창호 감독이 시나리오에서부터 감독과 주연까지 도맡은 이 영화 <길>은 전체 스토리는 대장장이 태석의 인생유전을 그린 내용으로 돼 있다. 그 속에 신영과 득수 부녀,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아내(설원정)의 얘기가 끼어 든다. 20년 동안 각지의 장터를 떠돌며 살아온 주인공 태석의 아픈 과거는 무엇일까. 그가 그렇게 털어버리려고 했던 과거의 기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의 기억 속 과거에는 죽마고우라고 생각했던 친구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현장이 담겨 있다. 둘 사이를 목격한 태석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의 정확한 기억일까. 섣부른 오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태석을 진정으로 괴롭히는 것은 아내와 친구의 배신이 아니라 그가 자칫 저질렀을지도 모를 ‘혼돈의 기억’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못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게 된다.
언뜻 보면 매우 올드 하면서도 신파 정서가 가득한 이 영화는, 그럼으로써 오히려 이야기 자체보다는 그것이 갖는 내면의 정서에 더 주목하도록 의도하고 있다. 작가가 나이를 먹고, 세상을 알면 알수록 이야기를 점점 더 단순하게, 또 점점 더 신파적으로 꾸미게는 법이다. 삶의 깨달음을 얻은 작가는 의도적으로 날을 세우지 않는다. 무딘 칼을 가지고도 충분히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팔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엉성한 칼이 오히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배창호의 <길>은, 영화 곳곳에서 펼치는 수려한 풍경을 통해 제목처럼 스스로가 로드 무비임을 드러내긴 하지만, 여기서의 길은 단순히 물리적인 ‘길’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길’, 그러니까 그 ‘방법(way)’을 가리키는 것임을 궁극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후반부에 태석이 힘겹게 산을 오르고 산등성이 어디쯤에서 자신이 오른 길을 뒤돌아 보는 신은 한국영화사상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장면이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무릎을 친다. 영화에서 부감 쇼트로 찍힌 배창호의 길은 직선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걸. 그의 영화 속 길은 늘 구불구불하게 휘어져 있다. 굽이굽이 산등을 휘감는 길들을 그는 먼 발치 눈길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주려 한다. 세상은 어쩌면 그렇게 돌아 돌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거기엔 숨어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이 영화는 대장장이 태석의 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밀려온다. 이건 배창호 자신의 영화 만들기의 고독에 대한 얘기다. 20년 동안 저잣거리를 돌며 칼을 갈고 낫을 갈았던 태석처럼 배창호 역시 30년 가까이 곳곳의 영화판을 돌며 이 영화를 갈고 저 영화를 갈아 왔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움직이는 건 그 과정에서 겪었을 한 작가의 밤샘 고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애써 외면해 왔다. 배창호 감독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의 고독은 결국 영혼을 잠식하기에 이르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가 지녀야 할 덕목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집, 끈기, 인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배창호 감독만큼 묵묵히,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작가가 있었을까. 그가 겪은 최근의 사고로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주저 없이 영화 <길>을 보기를 바란다. 영화 속에서 태석을 연기하는 배창호 감독이 실제로 묵묵히 길을 걸어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