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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해피엔드

정지우,1999

[한국영화걸작선]해피엔드 대표 이미지
정지우 감독의 첫 장편 <해피엔드>(1999)는 한국영화 역사상 여성 캐릭터의 욕망을 가장 도발적으로 그린 작품 중 하나다. 그 욕망이 어떤 결말을 맞는지 보여주는 방식 역시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그 욕망을 불뚝 들이민다.

첫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 최보라(전도연)는 애인 김일범(주진모)의 집으로 찾아가 격렬한 섹스를 나눈다. 정지우 감독은 섹스 신을 잘 그리는 몇 안 되는 한국 감독이다. 정지우 감독 영화의 섹스 신은 섹스를 기계적인 과정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관객의 관음증을 자극하기 위해 카메라가 마치 그 장면을 숨어서 훔쳐보는 듯한 시선을 취하지도 않는다. 그 장면에서 배우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내는 것은 물론, 카메라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그들이 그 순간 자유로이 느끼는 흥분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애쓴다. 섹스를 주도하는 남성 캐릭터와 그에 반응하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답습하고, 단순히 전희-삽입-오르가슴의 단계로 섹스를 보여주는 여느 한국영화와 크게 다르다.

<해피엔드>는 최보라와 김일범, 보라의 남편 서민기(최민식), 세 주인공의 이야기다. 최보라는 김일범과 서민기를 모두 가졌다. 두 남자와의 관계에서도 우위를 점한다. 남편 서민기와의 가정생활에서 최보라는 가장의 역할을 맡는다. 잘나가는 영어 학원 원장인 그는, 실직한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진다. 유치원에서 젖먹이 딸을 데려오고, 장을 보고, 분리수거를 하는 건 서민기의 몫이다. 밤마다 남편이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최보라가 늦게 들어가는 상황이 반복된다. 김일범 역시 최보라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신세다. 그런 그에게 최보라는, 그들의 관계는 ‘스치듯 만나는’ 것이라 못을 박는다.

이 중 서민기가 최보라에게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다시 취직하라 요구하는 최보라의 말에 서민기는 크게 자존심이 상한다.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서민기는 아내의 외도에 대한 첫 단서를 손에 넣는다. 아내의 외도 사실을 확신할수록 서민기는 아내 앞에서 당당해진다. 차가운 눈빛의 서민기 앞에서 최보라는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한다. 이때 서민기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 연희(딸)한테 당신이 좋은 엄마였으면 좋겠어.” 외도하는 아내에게 서민기는 자신과의 사랑을 저버린 잘못을 따지는 대신 엄마의 역할을 다하라 요구한다. 그에게, 결혼한 여자가 지켜야 할 제일의 덕목은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다. 김일범 역시 최보라와 스치듯 만나는 관계에 만족하지 않고 그와 ‘가정’을 꾸리고자 한다. 심지어 연희를 자신의 딸이라 믿기까지 하는 김일범. 서민기와 김일범 모두 최보라를 가정이라는 이름의 울타리 속에 가두려 한다. <해피엔드>는 그것을 거부한 여성의 욕망이 얼마나 처참한 단죄를 받는지 잘 보여준다.

서민기는 아내가 김일범을 만나기 위해 갓난 딸에게 상했을지 모르는 분유를 먹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내를 죽일 결심을 한다. 아내가 엄마로서의 의무를 저버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분위기가 180도 바뀐다. 이 지점까지 영화가 세 사람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 이 지점부터 영화는 서민기가 별다른 고민 없이 주도면밀하게 아내를 살해하고 그 죄를 김일범에게 덮어씌우는 모습을 재빠르게 그려 보인다. 영화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로맨스 소설이 갑자기 추리 소설로 변모하는 것 같다. 이 영화가 후반 들어 스릴러라는 장르를 빌려 서민기가 최보라를 벌하는 과정의 긴장을 증폭시키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살인을 저지르는 서민기의 섬뜩함을 한껏 드러내는 장치다.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는 아내는 죽여 마땅하다고, 그것이 자신의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는 서민기는 한국사회의 무의식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욕망이 갈수록 크고 다양해지는 오늘날,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가 그에 느끼는 위협과 복수심은 이렇게나 서슬 퍼렇다. <해피엔드>의 결말은 남성 중심적 한국 사회의 그 무시무시한 속내를 차갑게 꺼내 보인다. 여성의 뜨거운 욕망에서 시작해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이렇게 차갑게 들춰낸 장편 데뷔작이 또 있었던가. 바로 그것이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해피엔드>를 다시 봐도 그 뜨거움과 차가움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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