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영화리스트
도원경
리산드로 앨론소, 2014
한국영상자료원에 제출한 10편의 나의 영화 목록은 자료원이 제시한 기한 내에 속하되‘극장에서 본 영화들’을 기준으로 했으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유들까지 작동한 결과 작성된 사실상 위부터 아래로의‘순위별’이며, 그러므로 최고의 영화는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이다. 다만 나는 내게 훨씬 복잡하고 중요한 영화여서 좀 더 오래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느끼는 <자유의 언덕> 대신 지금 이 자리에서는 리산드로 알론소의 <하우하>에 관하여 쓰기를 택했다. 나로서는 최상의 것 대신 최적의 것을 택한 것인데, 어떤 목록의 제시 이후에 그 목록에 관한 해명의 글이 요구되는 자리라는 점에서 최적의 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하나의 경험이 계기가 됐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하우하>를 본 몇몇 동료들은 내게 물어오곤 했다. “이 영화의 무엇이 좋았는가?” 올해 칸 영화제에서 <하우하>를 보고 난 뒤 내가 이 영화를 영화제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적 최초로 강력하게 호감을 표방한 자의 구체적인 의견이 궁금했던 것 같다. 더하여 그 질문은 대개 두 가지 반문을 괄호 안에 포함하고 있었다. 이 영화의 무엇이 좋았는가(그다지 좋지 않던데?), 이 영화의 무엇이 좋았는가?(좋은 것 같기는 하지만 무엇이 좋다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던데?). 나는, 면밀하고 치밀하다 해도 사실상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화답으로는 거의 무용한 어떤 적극적 반론(나는 이만큼 정확하다) 혹은 작품과의 대면에서 발생한 불안정한 감각적 전압을 견디고 표현하는 지난한 과정은 회피한 채로 기존의 참조적이며 이론적인 용어들에 기대어 짐짓 우월한 지위를 점유한 척 하는 과시주의적 거드름(나는 이만큼 알고 있다)을 피우는 대신에, 거칠지만 솔직하고 미완적인 비평적 화답의 한 방편으로서 내가 이 영화를 관람하며 겪어 나간 순간순간 마다의 감각적 체험의 추이 자체를 복기하고 싶어졌다(나는 이만큼 느꼈다). 작품과 나 사이의 감각의 전압을 혹은 내가 작품에 빠져든 침잠의 상태를 할 수 있는 한 기록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하우하>를 관람한 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설득 대신 수기를 택한 것이다. <하우하>를 보지 못한 독자들의 경우라면 상당한 난독증을 겪을 것이 예상되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이런 방식을 택하게 됐다. <하우하>라는 영화 장면들의 흐름을 따라, 그 장면들을 보며 떠올랐던 나의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단상의 수준과 순서를 그대로 드러내며, 그러니 당연하게도 어떤 부수적이며 탈 맥락적인 또 다른 단상들의 개입까지도 허용하며, 그것들이 이 글의 구성에도 반영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애석하게 부산에서는 일정상 영화를 다시 보지 못했으므로 기억의 흐릿함과 부정확함이라는 무능까지 포괄하면서, 그 체험의 시간을 돌아보려 한다.

처음, 보다
제목이 <하우하>였다(부산영화제에서의 상영 제목은 <도원경>이었는데, 이 제목을 듣자마자 멋진 번역이라고 무릎을 쳤다. 모국어로서 이보다 더 근사하게 의역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이 제목은 앞으로도 유용될 만한 높은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혼선을 무릅쓰고 지금 구태여 <하우하>라고 적은 데에는,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 이와 같은 제목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감독이 영화의 제목에 관하여 했던 어떤 말이 기억에 남아서다.“무엇보다‘하우하’라는 단어의 소리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뭔가 인디언들의 지명처럼 들리기도 하고 이국적이면서도 불가사의한 것 같고,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부터 그 오묘함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씨네21,957호). 알론소의 이 말은 중요한 것 같다. 단지 작명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 영화의 연출에 관한 감독의 어떤 감각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뜻의 제목이 아니라 소리의 제목이며 기의의 제목이 아니라 기표의 제목이고 해석의 제목이 아니라 감각의 제목이다). 심신이 지쳐가던 칸 영화제 중반 즈음, 사물함을 열어 보니 이 영화의 전단지가 들어 있었다. 포스터를 보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 어두운 밤 혹은 새벽, 검은 대지의 지평선 너머로 푸르스름한 별과 빛이 보이고 가까이에는 기도하는 것인지 절망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채 눈을 감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비고 모르텐슨의 모습이 보였다. 포스터의 이미지만 보고도 이 영화와의 교감은 예감됐다. 그런 포스터들이 있다. 영화의 홍보가 전부인 것이 아니라 그 영화의 성질을 일견 담아내어 미리 느끼도록 하는 포스터들. 예컨대 홍상수 영화의 포스터는 내 느낌에 정확히 <밤과낮>부터 그런 중요한 존재물 혹은 일종의 부수적 예술 행위로 급상하였다. 가령 <밤과낮>의 포스터가 그렇다. 반바지를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어느 여자의 하반신, 계단 아래에 쪼그려 앉아 걸레질을 하다 말고 그걸 올려다보는 어느 남자의 어색한 자세와 시선, 그런데 그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담고 있는 저 불가사의한 분위기가 그렇다. 그런 불가사의한 분위기의 일종을 <하우하>의 포스터를 보며 느꼈다. 알론소의 전작들에 솔직히 그다지 큰 애정과 기대가 없는 편이었던 나는 어떤 막연한 기대에 부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극장에 들어섰고 첫 장면을 마주하자 그 즉시 전율이 일었다. 1.33:1의 화면비 안에 놓인 인물들의 정확한 자리 혹은 우아한 형상이 그 전율을 일으켰다. 나는 첫 장면에서 이미 이 영화에 관한 호불호가 갈린다고 확신한다. 이 장면을 아름다움의 성취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름다움을 가장한 위악적 제스처로 규정할 것인가, 나는 전적으로 전자라고 받아들인 관객이다. 알론소는 이 영화를 1.85:1로 촬영했으나 후반 작업 중 지금과 같은 화면비로 바꾸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화면비를 바꾼 다는 건 컬러로 찍은 뒤에 흑백으로 바꾸는 것만큼이나 대단히 위험하고 모험적인 결정이다. 그런데 이 위험한 모험은 적어도 이 영화에 관한한 옳았던 것 같다. 1.85:1의 <하우하>가 아름다울 리 없다고 나는 짐작한다. 화면비는 단순히 화면의 크기나 모양이나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형상과 화면이 서로 맺고 공유하고 결탁하여 일으키는, 이 말이 어쩌면 착란에 해당할지라도, 지각적으로는 밀도의 문제라고 나는 늘 느낀다. 화면비는 구도의 문제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인 것이며 어떻게 얼마나 채워져 있는가의 느낌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첫 장면, 바위위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딸의 장면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딸은 카메라 쪽을 바라보고 앉았고 아버지는 뒤로 돌아 앉았다. 인물들은 정중앙의 정확한 자리에 꽉 차 있었다. 아름답게 꽉 차 있었다. 그들의 몸은 화면 안에서 중대한 권위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화면의 모서리에서부터 그들 몸 까지 이어지는 어떤 거리와 여백 그리고 정중앙을 점유하고 있는 그들 몸의 밀도의 팽팽함 때문에, 나는 아직 감동의 원인을 찾아내기도 전에 감동부터 먼저하고 있었다. 칼 드레이어의 후기 영화를 볼 때 이런 벅찬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내용의 전개와 무관하게 저 인물들의 밀도 높은 육체성이 화면에서 차지하고 있는 어떤 중대한 아름다움으로서의 권위와 지위가 그 감동적 경험의 요인이 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점은 성공적일 때에만 그러하다. 예컨대 자비에 돌란이 <마미>에서 과감하게 선택한 1:1의 화면비는 유효하지 않거니와 치장에 가까워서 영화 내의 밀도를 허투루 만들어버린다. <마미>의 화면비 선택은 형상을 그 화면안에‘어떻게 채울 것인가’하는 지점이 아니라 화면의 양 옆을‘얼마나 잘라낼 것인가’하는 것에 치중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잠시 1.85:1의 화면비를 구사하는 대목에서야 <마미>는 가장 아름다운 화면을 보유하게 된다. 알론소가 <하우하>의 화면 네 모서리를 둥글게 구부려 놓은 건 물론 디자인적 발상인 것 같다. 누군가는 이걸 싫어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젠체하는 장난 짓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둥근 곡선을 이 영화가 현실 안에서 비현실을 껴안는 자세로서 갖춘 우아한 시각적 은유 또는 이 영화가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동화가 되기 위해 갖추었어야 할 충분히 필요한 시각적 보충물로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화면의 조건과 배경에 얼마간 눈이 익숙해지자 그리고 아버지와 딸의 육체를 벗어나자 이제 파타고니아의 드넓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SF영화가 세계의 어떤 기원을 강조하려 할 때마다 선택하는, 시간이 무화된 지리적 풍경이다. 하지만 나의 감탄의 다음 대상이 그 광대하며 원시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오히려 좁은 실내 장면을 보며 두 번째 감탄사를 뱉었다. 아버지와 딸이 머무는 작은 텐트 안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우하>를 보고 나서 존 포드의 <수색자>를 거론했다. 대표적으로 내가 칸 영화제 베스트 리스트를 청탁했던 평자 제임스 콴트는“형언하기 어려운, 알랭 레네가 연출한 것 같은 <수색자>”라고 <하우하>를 묘사했다. 충분히 공감할 만하지만 그건 <하우하>의 내용에서 기인한 감상이다. 공감할 순 있지만 내가 이 영화에 매혹된 이유는 아니다. <하우하>를 보며 내가 존 포드를 심각하게 떠올린 건 어느 한 대목인데, 딸을 찾아 나선 아버지라는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가 아니라, 딸이 떠나기 전 아버지의 잠자는 모습을 우두커니 보는 장면의 특정한 앵글에서였다. 그때 아버지와 딸을 각각 나눠서 찍고 있는 카메라, 거기서 느껴지는 어떤 기이한 애환과 존엄함이 문득 존 포드의 어떤 장면들의 무드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존 포드 영화의 앵글은 서사적으로 중요한 국면이 아닌 순간들에서조차 어떤 애환과 존엄함의 분위기를 엄중하게 품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지금 당장 해명하기는 어렵지만 연달아 특정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의 첫 장면과 <러틀리지 상사>에서 병사가 전장에서 호각을 불기 위해 화면 중앙에 우뚝 서 있던 그 장면들이 그 때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 인물들을 찍어내는 앵글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어떤 존엄함과 애환이, 서사적 흐름과 무관하게 닥쳐오곤 했던 그 무드가 딸이 아버지를 두고 떠나려 하는 그 순간에도 문득 내게도 느껴진 것이다. 그렇게 좁은 실내의 앵글이 별안간 존 포드를 상기시키며 흥분의 상태로 나를 몰아간 것이라면, 떠나간 딸을 찾기 위해 아버지 군너가 텐트를 걷고 외부로 나가자 이번에는 거기 버티고 있던 빛과 색들이 나를 쓰러뜨렸다. 딸은 젊은 남자와 함께 막사에서 도망쳤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딸을 찾아 나서려 한다. 그가 쓸쓸하게 제복을 주워 입고 칼을 차고 천막을 걷고 나와 맞은 그 새벽의 빛과 색 때문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모든 것이 어둠과 빛의 교차였고 모든 색은 자기들의 원색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로써 이 슬프고 힘겨운 순간에조차 영화는 도발적이었고 도취적이었다. 하늘은 짙은 청록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풀들은 녹색이었다. 저 멀리 산과 대지는 아직 칠흑같이 어두운 검정색이었고 덩그러니 놓인 텐트는 하얗고 하얀 흰색이었으며 텐트 옆의 모닥불은 주황색으로 활활 타고 있었고 그 옆에 갈색과 붉은 색이 반반씩 섞인 제복을 입은 이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많은 영화를 촬영해 온 촬영 감독 티모 살미넨이 촬영을 맡았다는 사실은 그 뒤에 알게 되었다. 칸 영화제에서 내가 본 영화들 중 여기에 견줄만한 빛과 색의 마술을 부린 작품은 토미 리 존스의 <홈즈맨>(촬영 로드리고 푸리에토)과 예시카 하우스너의 <아모레 포르> 단지 두 작품뿐이다(촬영 마틴 쉴라츠). 우리는 오즈 야스지로가 미루고 미룬 끝에 선택한 아그파 필름의 저 냉랭하고 음험한 색이 그의 영화에서 어떤 기이한 영화적 인상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다. 더러 누군가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오즈 야스지로에게 바쳤던 과장된 헌사를 기억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특히나 존경의 이유로서 오즈 영화의 그 붉은 색을 거듭 찬미했다. 그러한 특별하고 특정한 빛과 색의 효능이 <하우하>에도 있었다. 평론가 켄트 존스도 <하우하>를 보고 유사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이 영화의“거의 모든 이미지가 색과 빛의 모험이며 어떠한 외양적 술수나 조작도 없이 마네의 천부적인 색의 가치를 수행해내고 마는 많은 대목들이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므로 이 새벽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들이 오랫동안 낮 장면들이라는 사실은 내게 중요해 보인다. 이후에 군너는 쏟아지는 햇볕 아래 드넓은 대지를 대책 없이 해매고 돌아다니게 된다. 인상주의 화폭안에 담긴 듯 했던 강렬한 빛과 색은 이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도래하기 전까지 잊히고, 한동안은 오직 백주 대낮의 태양 아래 쓰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걸어다니는 군너의 처량한 여정뿐이다(문득, 정말 낮장면만 한동안 계속됐던가 의심이 든다.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글은 이러한 기억과 망각의 활동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니, 그에 근거하여 계속 전개해보려 한다). 그러니 빛과 색에서 받았던 나의 감동은 그의 허무하고도 피로한 움직임과 동선에 기인하여 또 다른 축으로 옮겨와 있었다. 군너의 움직임과 동선은 이 영화의 화면비율과 또 다른 긴장의 국면에 놓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는 거의 매번 수평으로 움직이는 법 없이 수직 혹은 대각선으로 화면을 질러 다녔다. 수평과 수직의 동선이 이론적으로 어떤 인지적 차이를 가져오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거의 정사각형의 화면을 오르내리락 반복하는 그의 움직임이 갑갑하고 무용해서 더 피곤해 보였던 건 사실이다. 무료하기는커녕 손에 땀을 쥘 정도의 긴장감으로 넘쳐나는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군너의 반복적이고 지난하고 피곤한 물리적 여정이 그러한 긴장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물리적 여정은 지겹거나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군너의 그 한 낮의 여정은 파트 1과 2로 교묘하게 나뉜다. 파트 1, 군너는 말을 타고 딸을 찾아 다닌다. (그러다 딸과 함께 도망친 젊은이 코르토가 혼자 죽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딸의 행방은 묘연하다. 군너의 근심은 더해진다. 하지만 그때 군너는 숨어 있던 원주민에게 총과 말을 탈취당한다. 때문에...) 파트 2, 군너는 이제 터벅터벅 걸어다녀야만 한다. 그는 더 느려졌고 더 피곤해졌으며 더 절망적이다. 말과 총을 잃어 버리는 사건 하나가 끼어 들어 내러티브 구조에 일단락의 임시적 균열을 일으키자, 그의 육체의 피로도와 심리의 긴장 상태는 급속하게 훨씬 더 아득한 늪으로 빠져 들었고, 동시에 그의 움직임과 동선과 속도감의 차원에도 더 큰 변화가 아니 더 큰 절망적 분위기가 배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도대체 이 정처없고 무력한 수색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문제의 털빠진 들개가 나타나 그를 한 명의 노부인에게 인도한다. 그리고 나의 감동의 정체도 그 개의 출현을 따라 서서히 다시 또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있다. 영화 속의 시간도 낮이 아니라 밤으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다가올 장면들에서 내게 감동스러운 것은 동선도 움직임도 아닌 그 밤이며 비통한 음악의 자리이며 몸의 흔적이며 폐쇄적 공간이며 기이한 대화이며 그걸 거치자 엄습해 오는 우주적이며 상대적인 시간에 대한 멜랑콜릭함이며 현실에서 어느새 비현실로 옮겨간 시간의 차원적 전환성이었다. 예컨대 군너가 노부인을 만나게 되는 대목에서부터 그녀와 헤어져 돌아가는 대목 사이에서 그러한 것들을 느꼈다. 들개를 쫓다가 밤을 맞은 군너가 기진맥진한 채로 장검을 옆에 벗어 놓고 바위 위에 털썩 드러 누운 그 순간, 밤하늘의 별들이 무수하게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그 순간 기타리스트 버켓헤드가 연주하는 기타의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길고 험한 육신의 피로와 심리적 상처의 아픔을 기타의 연주가 대신 울고 있었다. 저 뒤로는 지금 일군의 별자리들이 반짝이고 있고 군너의 잠이 혼란스럽게 깊어질수록 별들은 대지를 향해 세상이 끝날 것처럼 무리지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장면을 보며 어떤 앞선 장면을 기억해 낼 것이었다. 딸이 사라지기 직전, 영화 속 딸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연인 코르토에게 했던 중요한 말이 있다. 아마도 그들이 사랑을 나눈 뒤쯤이었을텐데 풀밭의 돗자리에 앉아 딸이 코르토의 등에 새겨진 반점들을 보고 매만지며 “꼭 별자리 같다”고 말한다.“쏟아지는 별처럼 아름답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말하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별자리 그리고 아름답게 쏟아지는 별들은 장면이 흘러 군너의 그 밤에 이르러서야 시각화 되는 것이다. 연인의 육체위에 새겨져 있던 그 아름답게 쏟아지는 별자리라는 모반에 관한 인상은, 딸을 찾는 아비가 바위 위에 지친 육신을 눕힌 그 밤에 이르러 실존의 풍경이 되어 있다. 누군가의 사랑은 누군가의 슬픔이 되었고 누군가의 등은 누군가의 하늘이 되었고 누군가의 모반은 누군가의 별자리가 되었다. 그 내부와 외부, 나와 타자, 육체와 우주의 기이한 설화적 이접이 나는 아름다웠다. 물론 이런 장면은 요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이 요설을 과장되어서 허위적인, 단지 지나친 형식주의로서의 탐미적 자세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반문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 자신에게 기입되어 있던 감탄의 경험들이 깨어나는 걸 느낄수 있었다. 저 멀리 불꽃 축제가 열리고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는 자동차의 수평 움직임속에서 도노반의 <허디거디맨>이 음울하게 들려오는 <조디악>의 첫 장면. 바비 빈튼의 <블루벨벳>이 고즈넉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정원의 한 남자가 뒷목을 짚으며 쓰러지고 풀숲의 잘린 귀로 카메라가 불길하게 이동해가던 <블루벨벳>의 첫 장면. 고되고 성스러우며 유머러스했던 종교적 여행길의 마지막에 이르러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 앞에 넙죽 업드려 경외를 바치는 그 순간 장엄하게 노래가 울려퍼지던 <새들의 노래>의 클라이맥스 장면. 시름에 젖은 여인이 슬로우 모션으로 국수통을 들고 좁다란 계단을 오르내리는 가운데 우베마야시 시게루의 현음악이 들려오던 <화양연화>의 국수집 장면. 그리고 수시로 그와 같은 순간들을 영화의 접히고 펼치는 접경지대로 사용하곤 하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들. 그것들에 황홀해 한 만큼 <하우하>의 이 장면에서도 황홀했다. 그리고 영화는 나의 황홀을 뒤로 하고 또 다시 앞으로 나아 갔다. 음악과 풍경의 장면들이 지나가고 빛의 장면들이 다시 도래했다. 하지만 이 번에는 다소 다르게 돌아왔다. 군너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노부인을 만나자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특별한 (어둠과) 빛의 효능이 이들을 감쌌는데 여기 특별하게 새로 개입해 들어온 것은 적절한 연극적 공간성이었다. 핀조명과도 같은 푸르스름한 한 줄기 빛을 받으며 군너와 노부인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군너가 노부인에게 병정 인형을 주니 그녀가 좋아한다(군너의 딸은 그 병정 인형을 갖고 도망쳤지만 군너는 그 인형을 딸을 찾는 도중에 발견했다). 둘의 대화는 가까워졌다가도 조금씩 빗나간다. 이 노부인은 누구인가. 노부인은 군너가 잃어버린 딸의 노년의 모습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그렇게 애매해지는 사이에 어떤 사물과 제스처는 놀랍도록 다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차지하면서 우리를 자극한다. 딸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나침반과 병정 인형은 군너와 노부인 사이에서 화제에 오르고 마침내 첫 장면에서 딸이 아버지의 어깨에 살짝 고개를 기대었던 것처럼, 노부인이 군너의 어깨에 그렇게 기대며 같은 제스처를 보일 때, 마침내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사실로서 일치짓고 확정짓는 것과 무관하게, 말하자면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그 인상관계 때문에 아득한 애처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첫 장면에서 딸이 자신은 언제쯤 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냐고 물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지금의 노부인이 오로지 개를 가졌을 뿐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아직은 남아 있는 에필로그에서 현대의 어느 대저택에 사는 소녀가 털빠진 개를 또 한 마리 갖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세 마리 개만이 실마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즈음에 영화적 사태를 직감한다. 우리가 군너의 움직임과 동선을 좇아 다니는 동안 군너의 실종된 딸은 그녀의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군너가 그의 물리적 시간을 사는 동안 딸은 그녀의 서사적 시간을 살아갔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앞에 있는 저 노부인이 군너가 그토록 찾아 해멘 그의 딸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 말해도 그것은 사실 관계가 아니라 인상 관계로서 그러하다. 딸을 찾아 헤맨 군너의 시간관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걸 가능하게 하는 시간관은 무엇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하우하>를 본 내가 이때쯤 직감하게 된 것은, 우리가 군너의 여정을 따라다니는 동안 실제로는 더없이 동화적이며 설화적이어서 상대적인 시간의 대지를 건너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근거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 밤 장면은 기껏해야 한 번 정도 등장한 것 같다(나는 여전히 나의 이 기억과 진술이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 의심에 바탕해서 감상을 지속하려 한다. 며칠 밤이 등장했다 해도 사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밤과 낮의 등장 시간으로만 측량하자면 군너는 단 하루의 시간 동안 딸을 찾아 헤맨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럴 경우 단 하루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하지만 알론소가 군너의 그 무수했던 밤들 중 오로지 어느 하룻 밤만을 특화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이 영화의 시간이 하루라고 우린 단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경우 이 영화는 하루처럼 보이도록 구성된 수많은 날들로 구성된 영화다. 물론 여기에는 군너의 변하지 않은 외양이라는 또 다른 모순점이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어느쪽이건 군너가 그렇게 오래 낮의 장면들을 해메야 했던 이유 중에는, 그리고 우리가 그걸 보아야만 했던 이유 중에는, 구조적 혼돈을 통한 시간의 상대적 성립이라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밝음과 어둠으로 계산되는, 그리고 그것때문에라도 실제로는 계산이 아리송해지는 낮과 밤의 시간의 흐름과 군너라는 인물의 동선에 따른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심리적 시간의 흐름이 동화적이고 설화적인 이 영화의 상대적 시간의 빅뱅을 가능케 하고 있다. 시간의 초점을 모순되게 하고 중첩시켜 상대화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알론소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점時點이 중첩된다면 시점은視點 전환된다. 그리고 시점視點의 전환을 따라 시제의 전환까지 이루어진다. 기이한 건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비주얼이 아니라 보이스라는 데 있다. 노부인의 동굴을 나온 다음 군너는 힘없이 무릎을 꿇는다. 내가 포스터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자세로 그는 절망한다. 내 기억으로는 바로 이때쯤 여인의 보이스 오버가 들려왔고, 군너의 저 여정을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번역된 영어 자막에 근거하자면) 과거형이었다. 노부인의 보이스 오버로 그렇게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정리해내자 이 영화는 갑자기 그간의 서사에서 완전히 돌아서, 군너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어떤 회상의 이야기인 것 같은, 그것도 그녀가 과거에 겪었던 회상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 시점 주체의 전환 및 시제의 전환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 것이다. 보이스 오버의 출현에 따른 시점視點과 주체와 시제의 변경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영화에 그어지는 또 하나의 곡선이었다. 군너가 동굴을 빠져 나와 걷는 그때 목소리는 묻는다.“무엇이 삶을 움직이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그리고 잠시 뒤 군너가 대지에 무릎을 꿇을 때 그 말은 한 번 더 반복된다.“무엇이 삶을 움직이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디졸브가 일어나 장면이 바뀌고 이 영화의 2부에 해당하는 짧은 에필로그가 등장한다. 동시대의 어느 대저택에서 어느 소녀는 잠이 깬다. 앞선 이야기는 꿈이었을까. 소녀는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가고 아버지를 만난다. 앞서 딸을 찾는 아버지 군너의 긴 수색이 있었다면 에필로그에는 아버지를 스쳐 지나간 딸의 짧은 산책이 있다. 소녀는 숲속에서 병정 인형을 줍지만 잠시 손에 쥐었다가 무심하게 호수에 휙 던져버린다. 병정 인형이 동심원의 파장을 일으키고 그 물결에 군너가 해멨던 19세기 파타고니아의 풍경이 잠시 비쳤다가 사라진다. 무엇이 삶을 움직이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나는 생각했다.
다시, 보다
나의 두 번째 관람도 짧은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알론소의 인물들은 전작에서도 대체로 “외로운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누군가를 찾아 나서거나 향해갔고, 광대한 풍경을 혹은 폐쇄된 장소를 느리고 오래 유영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인공의 내용적 여정에 새롭게 인위적이고 구조적으로 어떤 성질과 상태가 부여됐다는 점일 것이다. 알론소는 아르헨티나 시인인 파비앙 카사스가 쓴 시나리오에서 자신이 취하고 싶은 것들을 취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는데, 개인적인 바람을 말하자면, 알론소가 카사스와 지속적인 작업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카사스가 알론소 영화의 수준을 급상시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알론소는 전작들에서 시각적 인위와 연관된 사건의 매듭을 고안하는데 매우 불철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그렇게 무관심해야만 좋은 영화라고 믿는 경우들이 많았다. <하우하>는 다르다. 인물과 사건의 매듭이 전체 구조에 보다 긴밀하면서도 중요한 관계를 맺으며 영화 전체의 신비로운 리듬이 배가됐다. 그의 전작들은 인위적 구조에 무관심한 대신, 앵글에 담기는 장소의 리얼한 공기의 농축에 치중했는데, 자신이 취하고 싶은 만큼 완전치 못해서 원하는 만큼 충분히 물질적이지 못하거나 얼마간 지루했다. 알론소의 영화들은 무언가 조금씩 미비했고 그걸 자신의 형식적 진지함으로 덮곤 했다. 그런데 티모 살미넨의 참여가, 카사스의 시적인 개입이 알론소의 세계를 고양시킨 것 같다. 어쩌면 동시대의 감독들을 신중하게 의식한 긍정적인 결과일 수도 있겠다. <하우하>는 확실히 알베르 세라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들을 의식하고 있다. 현실에 인위적 구조를 더하여 비현실을 풍요롭게 끌어안으면서 다시 현실 쪽을 바라보게 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이 긍정적이면서도 은밀한 모사의 성취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더 지켜보아야겠다. 다만 어떤 영화와 닮았는가 하는 것은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부터 빅터 시외스트룀의 어드벤처물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와 닮았다고 거론되는 수편의 영화들에 관해 나는 들었지만, 그 지적들이 중요하게 들리지 않는다. 어떤 영화와 닮았는가 지적하는 것 보다는, 어떤 영화를 느끼는 방식으로 이 영화도 느낄 것인가, 묻는 건 어떨까. 알베르 세라의 미치광이 기사와 우스꽝스러운 동방 박사들을,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주정꾼들과 길 잃은 소년들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승려와 군인과 요괴들을 느꼈던 감상의 방식과 흡사하게 느껴보는 건 어떨까. 이른바, 불가사의함에 관한 시적 무드의 설화 내지는 동화라고 간주하며 감상해보는 것은 어떠할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알론소의 영화가 얼마나 더 신비롭고 도발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지 나는 이러한 감각의 과정들을 체험하며 <하우하>에 깊이 도취되었고, 좀처럼 거기에서 깨고 싶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