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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마이 대드

마커스 아미테지, 2014

[초이스]마이 대드 대표 이미지

“우리 아빠는 최고야. 우리 아빠는 무서워하는 게 하나도 없다. 커다랗고 험상궂은 늑대도 안 무서워한다… 우리 아빠는 최고야… 고릴라만큼이나 힘이 세고, 하마만큼이나 늘 기분이 좋다. 우리 아빠는 최고야… 그리고 나를 얼마나 웃겨 주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 아빠가 정말 좋다. 왜 그런지 알아? 아빠가 나를 사랑하니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아빠>라는 제목을 듣는 순간, 대다수의 영국 관객들은 위와 같은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2000년에 발표한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말이다. 출간과 동시에 아이를 둔 가정의 필독서가 되었고, 이후로 매년 아버지의 날이면 아이들은 ‘우리 아빠가 최고!’라는 머그잔을 선물한다. (때마침 앤서니 브라운의 전시회가 지금 서울에서도 열리고 있다) 

마커스 아미티지의 2014년 단편 <우리 아빠>도 비슷한 대사로 진행된다. “우리 아빠는 나를 학교에서 데려오고… 이발소에 함께 가기도 하지… 우리 아빠는 신문을 볼 때면 늘 불평을 늘어놓고… 금요일에는 항상 피시 앤 칩스를 먹고… 휴일에는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를 먹지...” 초반만 하더라도 주인공의 아빠는 그림책 속 아빠처럼 멋지지는 않더라도, 그럭저럭 평범한 (혹은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의) 아빠로 여겨진다. 크레용으로 그린 이미지는 그다지 그림 실력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아 보이는데, 여기에 담긴 모습에도 아이다운 천진난만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야수파의 회화처럼 그 속에는 뭔가 거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다. 거친 기운은 이내 핸드헬드 카메라로 급박하게 찍은 영상처럼 불안정하게 끊임없이 부유한다.

아이가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과 동네 풍경은 왁자지껄하다. 처음엔 그저 활기 넘치는 소란스러움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빠에 대한 설명이 반복되면서 표현은 강렬해지고, 움직임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우리 아빠는 신문을 볼 때면 늘 불평을 늘어놓지… ‘빌어먹을 세상, 내 탓이 아니야’… ‘영어도 할 줄 모르는 것들, 우리 나라에서 당장 꺼져버려’…” 소란스러운 거리의 풍경 속에 10대 또래들의 일탈이 언뜻 보이기도 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방관, 방치하는 듯하며, 이주민과의 갈등이 담기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그저 축구 경기에 열광하는 와중에 빚어진 후끈함의 여파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주인공인 아이는 그림책의 감성을 가진 ‘순수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반복되는 목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아이의 말이 꽤나 어리숙하게 들린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말을 더듬는 횟수가 잦아지고, 발음도 뭉개진다.

오프닝에서 굵은 활자로 “My” “Dad”라는 제목이 등장한 것처럼, “My” “Dad” “Says”라는 대사는 단단하고도 투박한 글꼴로 이야기 사이에 줄곧 등장한다. 이러한 전개 속에서 이미지에는 차츰 균열이 생긴다. 크레용 그림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리거나 프레임 이미지가 찢어지면서, 그 아래로 활자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이미지를 비집고 등장하는 활자는 신문 기사를 뜯어 붙인 입체주의의 콜라주처럼 보이기도 하며, 다다의 활자 차용처럼 의미를 없애버리는 장치로 보이기도 한다. 아빠에 대한 언급이 되풀이되고 가속도가 붙을수록 활자의 개입도 더 강도를 높인다.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개입하는 이 활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짐작하듯 ‘아빠가 늘 보는 신문’이 뱉어내는 표식들이다. 줄기차게 선정적이고도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옐로우 저널리즘. 아빠는 신문을 안 읽어서 거칠고 무식한 게 아니라, 너무 열심히 읽어서 거칠고 무식하다. 신문이 처음부터 아빠를 거칠고 무식하게 세뇌시켰다기 보다는, 아빠의 불만을 신문이 ‘이민자의 문제’로 여기도록 ‘프레임’을 짜줬다. 불안을 불만으로, 불만을 분노로, 분노를 혐오로, 그리고 증오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크레용 그림과 활자의 뒤엉킴, 반복되면서 겹치고 뭉개지는 내레이션이 카오스를 이루면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빠를 비롯한 어른들이 경찰과 맞서고 있다. 훌리건의 모습을 한, 반이민자 집회의 장면. 양측의 충돌이 벌어지는 순간 영상은 정지한다. 멈춘 그림이 찢어져 나가면서 그 아래로 거친 흑백 사진이 드러난다. 포토저널리즘에 전형적으로 쓰이는 사진 이미지이다. 이를 통해 <우리 아빠>는 이 이야기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지칭한다.

사진이 크레용 그림의 실체를 폭로해내는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드러내는 것은 바로 주인공의 얼굴이다. 마침내 보여지는 아이의 얼굴은 생각보다 앳되다.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처음에는 10살 안팎의 아이로 여겨지다가, 중간에 10대 중후반의 청소년인 듯싶었는데, 다시 10살 초반대로 변한다. 아이는 아빠라는 어른의 세계 속에서 어느덧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 아빠>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책의 마지막은 아빠와 아이가 두 팔 벌려 꼬옥 끌어안은 장면인데 반해, 마커스 아미티지의 <우리 아빠>에서는 한껏 겁먹은 아이가 아빠 뒤에 숨어있는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지난해 (2015년) 한국에 소개된 외국 단편 애니메이션 중에서 최고작으로 꼽는다. 애니메이션이 여전히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를 증명한 작품이기 때문이고, 새로운 형식의 애니메이션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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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빠> 감상하기 https://vimeo.com/9781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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