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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너에게 나를 보낸다

장선우,1994

[한국영화걸작선]너에게 나를 보낸다 대표 이미지

이 영화는 개봉되었을 당시 몇몇 여성평론가들에 의해서 ‘여성의 육체를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의 대상으로 위치 지우고 무비판적으로 소비한다’는 고전적인(?)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로라 멀비가 수립한 바 있는 영화 재현과 관련된 성차 이분법, 즉 남성 주인공(혹은 남성 관객)과 여성 주인공(혹은 여성 관객)을 주체와 대상, 관음증과 노출증, 가학증과 피학증으로 이원화하는 이론은 이후 수많은 시네페미니즘적 성찰과 노력에 의해 비판적으로 재구성된 바 있다. 이처럼 새로운 퍼스펙티브에 입각해서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바라본다면, 다른 방식의 해석과 평가가 가능할지 않을까?

우선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전반적으로 주체 위치의 끊임없는 가변성을 보여준다. 소설가는 신춘문예 당선 작가에서 도색소설 작가로, 사랑하는 여자의 운전수로 자리바꿈한다. 은행원은 평범한 직장인에서 포주로 그리고 작가로 변신한다. ‘바지 입은 여자’는 공순이에서 시인으로, 성매매 여성에서 대중 스타로 출세(?)한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욕망이 보여주는 저열함과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주체 위치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이 욕망들이 어떻게 성차에 따라 달라지는가를 흥미롭게 가시화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일관된 것은 ‘바지 입은 여자’의 욕망이고, 이는 남성들의 ‘억압된’ 욕망과의 관련 속에서 움직인다. 즉 그녀의 욕망은 소설가의 문학적 성취에 대한 욕망, 은행원의 일상 탈출 욕망, ‘오만과 자비’의 유사 정치적 권력에 대한 욕망은 물론이고, 세 사람 모두의 성적 욕망들과의 상관관계 속에 놓여진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의 전개 과정과 상호 관계를 가장 핵심적으로 기록해내는 것은 그녀의 육체이다. 여기에서 여성의 육체는 욕망과 무의식이 무한히 전치되는 장이자, 심리적 외상이 물리적으로 기록되는 장으로서 기능한다. ‘오만과 자비’에게 정신적으로 모욕당하고 (“네가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지적인 콤플렉스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능멸(강제적인 항문성교)당한 후에 그녀가 ‘거식증’이라는 정신병에 걸리고, 미친 듯이 책에 집착했던 것은 그녀의 육체가 남성들의 담론을 받아내고 이를 물리적으로 재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또 그녀의 육체는 남성들의 욕망을 ‘수행’한다. 극 중 한 남성의 “내 숟가락을 빨아봐. 너를 퍼먹는 것 말이야”라는 말이 압축하듯이 남성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통해서 그녀(크게는 여성들)를 ‘퍼먹는다.’ 그녀는 소설가가 ‘글을 쓰게’ 하고, 은행원의 그것이 ‘서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녀의 욕망 및 섹슈얼리티에 있어서 핵심적인 기호는 미니스커트이다. 무엇보다도 미니스커트는 그녀에게 ‘섹슈얼리티의 자의적인 운용’과 ‘복장으로서의 육체’라는 함의를 지닌다. 우선 그녀의 미니스커트 중독증은 그녀가 여성성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항상 열려 있는 것으로 스스로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니스커트는 그녀가 여성성에 대한 본질론적 규정을 자의식적으로 수용하면서 전면화시키고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복장에 새겨진 여성 주체의 의지’로도 읽혀질 수 있다. 즉 그녀는 남성 중심적 사회가 다양한 제도적 기호들을 통해서 구성해내는 여성의 육체를 미니스커트라는 물신을 통해서 스스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구성해나가고, 그 과정 자체를 자기 욕망을 충족시킬 능동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광고모델과 배우로 성공하는데, 이것은 내러티브 과정에서 일관되던 그녀의 욕망, 즉 남성들의 ‘불 꺼진 욕망’을 슬퍼하며 다시 불붙이려는 욕망이 자본주의적 사업의 일부로 확대되고 사회적 권력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영화 엔딩에서 그녀는, 한편으로는, 한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가방모찌이자 운전사가 된 남성의 응시를 자동차 백미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받는 위치, 즉 타자들의 시선을 되 튕기면서 심문하는 위치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행원의 베스트셀러를 차창 밖으로 집어 던져 무자비하게 뭉개버리는 행위를 통해서 남성 중심적 지식과 상상력을 철저하게 조롱하는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이제 여성은 자신을 지배했던 반사체계(특히 포스트모던 시대의 총아인 영화를 포함한 영상 매체)를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 반사체계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유효한 수단으로 삼는 존재가 되는 동시에, 남성 중심적 에피스테메의 자장 외부에 스스로를 위치 지우는 일견 초월적 주체 위치를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해석의 과잉’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재현의 정치학’의 초점을 성차 중심으로 이동시킬 때 발생 가능한 ‘차이의 생산’ 혹은 ‘생산적 차이’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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