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운명의 손
한형모, 1954
클로즈업이 돋보이는 영화 <운명의 손>은 트렌드 리더로서 한형모의 작가적 풍모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시기적으로는 1953년의 휴전 후, <춘향전>(1955)이나 <자유부인>(1956)으로 이어지는 한국영화의 부흥기 직전에 완성되었다. 스파이 물의 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의외로 알맹이가 50년대 멜로드라마의 원형을 띠고 있어 눈길을 끈다. 게다가 ‘키스신이 담긴 최초의 한국영화’라는 타이틀은 영화가 가진 껍질과 알맹이의 괴리감을 더 넓혀준다. 어쩌면 이러한 경향은 1998년작 <쉬리>가 보여주는 주인공의 사회적 입장과 멜로드라마의 결합과 비슷한 형태를 띤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접사 된 손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약 1분여 동안 담배 파이프를 쥔 남자의 손이 보이다가, 이윽고 그 손이 바걸이자 간첩인 마가렛(윤인자)의 현관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집은 텅 비어 있다. 이후 귀가한 마가렛은 구타당해 쫓겨 온 영철(이향)을 자신의 집에 들여 치료해준다. 사실 영철은 방첩 장교이지만 마가렛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다. 둘은 첫눈에 호감을 느끼지만 애초에 어울릴 수 없는 관계다. 둘 사이의 아슬아슬한 갈등은 마침내 산꼭대기 동굴에서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폭발한다. 마가렛과 영철, 간첩단 두목(주선태) 간의 삼파전에서 끝내 살아남는 자는 오직 영철뿐이다. 그렇지만 홀로 남은 그의 생존은 어쩐지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당대의 훼손된 주권, 더불어 손상된 남성성 등 역사적 트라우마와 관련된 한국의 젠더 정치학을 압축해서 그려낸다. 주인공 영철은 한국영화 속에 자주 언급되던 ‘결핵에 걸린 지식인’이나 ‘무능한 노동자 계급’ 등의 변형된 캐릭터로 볼 수 있다. <쉬리>에서 감정에 치우쳐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OP의 특수비밀요원 유중원(한석규) 역시 이 캐릭터의 연장선상에 있다. 영철을 참고하다 보면 <운명의 손>은 한국 남성성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그린 영화로 정리된다. 이러한 역사의 상흔을 강조하기 위해 감독은 반복적으로 클로즈업 기법을 활용한다.
마가렛과 방첩장교 영철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한 남자의 손이다. 그 손은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결코 얼굴로 전이되지 않는다. 단 한 장면, 동굴 장면에서 비로소 얼굴을 드러낼 뿐이다. 간혹 발이나 구두로 옮겨지더라도 여전히 손의 형태는 과장된 접사의 형상으로 화면에 모습을 드러난다. 이때의 클로즈업은 공포를 불러오면서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끌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게다가 손의 상징성 덕분에 주인공 간의 관계가 가지는 모순성이 더욱 커진다. 은밀한 절망감이나 인간 내면에 잠재된 항거의 욕구 역시 마찬가지로 상승된다. 그렇다고 <운명의 손>에 드러나는 화면의 경향성을 한형모 개인의 특성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대중문화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 매 작품 새로운 시도를 펼친 그의 시도만큼은 온전히 그의 공로다.
클로즈업의 사용뿐 아니라 뉴스릴의 활용에서도 감독의 숨은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해방 후보다는 한국 전쟁의 이후, 많은 상이군인들이 발생했고 이산가족들이 생겨났다. 영화는 분단과 함께 진행된 미국의 군사 지배가 시작되는 상황을 미군이 항구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는 장면으로 제시해준다. 이때의 교차편집이 흥미롭다. 마가렛과 영철의 상황 탓도 있겠지만, 서로를 찾는 두 인물들의 시선은 찡그린 상태다. 그들의 표정 사이로 미군의 행렬을 촬영한 뉴스릴 필름들이 교차되어 들어간다. 이처럼 미묘한 편집을 통해 영화는 프로파간다필름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남한의 우월적 지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세련됨을 보인다.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서 마가렛은 희생된다. 그녀의 희생 덕에 영철은 살아남지만, 어떤 기준으로도 그의 생존이 이상적 혹은 독립적이라 여겨지진 않는다. 이 장면의 배경은 동굴인데, 동굴을 통해서 영화는 으스스한 고풍적 느낌의 판타지를 생성해낸다. 배경의 판타스틱한 효과는 당대의 사회적 정황과도 무관치 않다. 즉, 주인공 영철은 마치 악마의 궁에 도달하기 위한 공포소설의 주인공처럼 눈앞에 놓인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는 이념적으로 적군이었으며, 홀로 살아남았지만 그 결과는 온전한 자신의 역량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부터야 말로 그는 검은 우물 속으로 깊이 빠져들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반지 낀 운명의 손은 사라졌지만 진정한 그의 운명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