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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은교

정지우, 2012

[한국영화걸작선]은교 대표 이미지

내 삶에서 은교의 시간이 언제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이적요의 시간이 조만간 혹은 확실히 언젠가는 닥칠 거라는 걸 안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라고 힘겹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던 그 노인인 듯 청년 같던 그 남자가 떠오른다. 

어느 날 그의 삶 속으로 은교가 왔다. 그리고 세상이 열렸다. 일흔의 ‘국민시인’ 이적요(박해일)의 인생에 불쑥, 열 일곱 여고생 은교(김고은)가 뛰어든다. 은교의 등장으로 인해 ‘커다란 관’ 같던 시인의 집은 여름 숲으로 바뀌고, 느려져가던 노인의 맥박은 다시 힘차게 고동친다. 하지만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으로 평생 스승 이적요의 곁을 지키던 소설가 서지우(김무열)는 은교의 등장이 탐탁지 않다. 은교의 깃털 같은 발걸음은 두 남자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은교에 대한 마음을 담은 시인의 노트는 서지우의 거짓 명성을 흔드는 일대 사건의 발화점이 된다. 

<은교>는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문학동네)를 <해피엔드>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소설과의 유사도를 묻는 질문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동시에 무의미하다. ‘거울’이 ‘별’이 ‘연필’이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가지듯 박범신의 ‘은교’와 정지우의 ‘은교’는 다를 수밖에 없다. 대신 400페이지가 넘는 동명 소설은 영화 <은교>의 견고한 뿌리이자 절대적 ‘시제’로 자리 잡는다. 가림없는 노출신과 적나라한 섹스신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그것들이 그들에게도 존재함을 보여주는 목적으로 배치된다. 가슴과 성기 그리고 사랑과 욕정, 그것은 여고생에게도 명망 있는 노시인에게도, 젊음에게도 늙음에도 공평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박범신의 소설 「은교」가 ‘납으로 된 옷’을 입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시인 이적요의 폭풍 같은 사랑과 쓸쓸한 소멸을 후일담으로 회고한다면, 정지우의 영화 <은교>는 이적요와 은교 그리고 서지우의 관계를 현재적 멜로드라마로 풀어놓는다. 복원 될 길 없는 젊음, 공유할 수 없는 관계의 역사, 훔칠 수도 따라 잡을 수도 없는 재능. 이적요와 은교과 서지우는 각자 서로를 질투하고 욕망하고 또 사랑하며 낭떠러지를 향해 뒤엉켜 굴러간다. 또한 ‘시인의 노트’ ‘서지우의 일기’ ‘변호사의 목격담’이 교차되는 소설 속 ‘은교’가 세 남자에 의해 묘사된 ‘대상’이라면, 영화 속 은교는 능동적인 화자가 되어 제 목소리를 낸다. 극 초반을 경쾌하게 이끄는 유머나 후반의 드라마 역시 은교의 행동과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입구를 발견한 것도 출구를 찾는 것도 은교다. 

너무 늦게 쓰여진 노인의 연서. 그것을 너무 일찍 읽어버린 소녀. 답장 없는 편지를 평생 써왔던 미련한 청년. 그들에게 불어닥친 짧지만 강렬했던 폭풍이 잦아든 자리에 남는 것은 쓸쓸함과 외로움이다. 바로 뒤에 있는 사랑을 차마 뒤돌아 안지 못하는, 본능을 이기는 슬픈 체념이다. 잘 가라, 은교야. 잘 가라, 더는 나의 것이 아닌 청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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