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38-39°C
김강민, 2011
스톱모션이라는 미학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이론에 의하면, 이 예술 장르에 적합한 미학의 뿌리는 색채론과 표현주의, 그리고 비선형적 공간구성 등 상당 부분 모더니즘적 전통에 기대어 있다. 물론 필름(film)이라는 뉴미디어의 등장과 소비가 가능하게 된 시점이 모더니즘의 공간이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당연히 그 시대적 모멘텀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초기의 애니메이션이 상당 부분 실험적 영화의 틀 내부, 그리고 모더니즘 회화 작가들의 활동에 의해서 유지된 점도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색채, 움직임, 추상화(abstract), 분절적 공간 구성 등은 애니메이션의 주요한 미학적 지표임에는 틀림없다. 적어도 전통적인 애니메이션(orthodox animation)에서는.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접근, 또는 적용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양식이 있는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그렇다. 일반적으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세트를 제작하고, 퍼펫을 만들어 그것들을 실재하는 공간에 배치한 다음, 이들의 포즈를 사진이라는 기계적 특성을 이용해 기록한다는 점에서 실사영화의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괴테의 색채론 보다는 데카르트의 광학이론이, 캐릭터와 공간의 비선형적 분절보다는 선형적이고 비분절적인 공간 구성이 우선한다. 무엇보다도 스톱모션은 가상의 빛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광원으로 공간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작품 제작의 공간은 오히려 실사영화의 세트촬영을 축소한 형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결과물은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과 실사영화의 특성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가 각자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나갈 때에도 실사영화의 한 꼭지(마치 최근의 디지털 영화의 그것처럼 영화 속 FX 효과의 하나로서 합성)로 최근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스톱모션 이미지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공유하며 두 영역 사이의 다양한 이미지들과 쉽게 병치되거나 합성될 수 있다. 후에 언급할 김강민 감독의 <38-39°C>은 이러한 스톱모션 이미지의 특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들의 환영적 병치 또는 환상적 리얼리즘
목욕탕을 찾은 한 중년의 남성이 (아마도 아버지처럼 보이는) 누군가를 기억하게 되는 백일몽의 이야기를 담은 <38-39°C>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며, 종이를 이용해 인형을 만든 페이퍼 퍼펫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물론 작품에 사용되는 퍼펫은 쇼트의 특성과 카메라의 앵글에 맞춰 각각 별도로 제작되었는데, 캐릭터들은 평면의 색면이면서 동시에 카툰적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작품의 세트는 모두 정교하고 깊이감 넘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게 목욕탕 입구와 내부로 나뉜다. 입구는 평면적인 배경을 애니메이션의 레이어와 같이 배치하고 입체적 소품들을 병치하여 독특한 느낌을 환기시킨다. 이에 비해 두 번째 주요 공간인 욕실 내부는 상당히 입체적이고 빛과 그림자에 의해 구분되어 상당히 실사 영화적이다. 세트에 상당한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며, 오랜 기간 노하우를 통해 완성된 스타일처럼 보인다.
예의 언급처럼 스톱모션 이미지의 이중적 의미에서 보이는 공간들은 비단 세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작품의 쇼트구성도 마찬가지인데, 욕실 내부를 그린 두 번째 시퀀스 초반 역시 상당히 실사 영화적이다.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쇼트들 사이로 녹아들어 있는 공간의 인서트들은 이 작품의 독특한 이미지만큼이나 신선하면서도 우아하다. 특히 목욕탕 내부에 스며든 수증기와 빛의 궤적을 더듬는 장면들은 연출자가 가지고 있는 실제 빛과 광선에 대한 이해와 재능을 놀랍도록 실감하게 만든다.
다시 작품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목욕탕에 찾아온 남성의 이야기이다. 공중목욕탕의 ‘남탕’ 하면 흔히 떠오르는 키워드는 보통 ‘문신남’, ‘때’, ‘아버지’, ’바나나우유’ 정도가 되는데, 이 작품도 오래되고 홀로 남겨진 듯한 공중목욕탕의 이미지 속에서 중년이 된 남성을 통해 ‘아버지’를 소환한다. 작품의 두 번째 시퀀스인 백일몽 장면은 이러한 아버지를 호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작품의 초반과 후반에 언급되는 팽이는 시간과 엮인 과거로의 상징적 배치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에서 과거의 한 장소를 소환하는 과정이다. 감독은 과거의 이미지(등이 붉게 타오른 아버지)를 소환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물질적인 필름이미지를 동시에 불러들인다. 영화관에서 셀룰로이드 필름이 타들어 가는 듯한 이미지부터 필름 스트립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속도감 있는 색면들의 병치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자유롭게 충돌시키고 있다. 마치 렌 라이(Len Lye)의 작업처럼 보이는 느닷없는 이미지들은 스톱모션이라는 이미지, 그리고 프로젝션처럼 보이는 배경 이미지들과 함께 병치되면서 물질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감독의 이러한 이미지 병치는 스톱모션 이미지라는 이중적 양식에 절묘하게 들어맞으면서도 동시에 표현주의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만들며 스스로의 작가성을 드러내고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감독은 작품 속에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상당히 다양한 방법을 접목하고 있는 듯한데, 투명한 유리를 카메라 앞에 두고 소프트렌즈 효과를 만들기도 하며, 미디어 파사드와 같은 프로젝션 기술을 사용하는가 하면, 후반 과정을 통해 작은 이미지의 변형을 주기도 한다. 가장 원형적인 빛의 이미지와 그것에 대한 이해력, 세트와 캐릭터에 주어진 색채와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자유로운 이미지들의 인서트와 텔롭(작품의 이미지 위에 얹히는 타이포그래피) 등은 그가 가진 작품의 색을 풍부하게 만들어 나간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복제와 움직임이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완성하는 동시대적인 이미지인 ‘합성’이미지에 가깝다. 또는 스톱모션이라는 사실적인 세트에 느닷없이 ‘낯설게’ 접근해 들어오는 캐릭터와 이미지들은 결국 이 작품을 환상적 리얼리즘에 가깝게 만들어 버렸다.
스톱모션이라는 경계
사실 스톱모션은 가장 오래된 애니메이션의 제작기법이다. 말하자면 초기 실사영화의 기법 연구 과정에서 등장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에는 CG와 디지털 이미지의 등장으로 인해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려워졌지만, 그럼에도 스톱모션은 많은 부분에서 아직까지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면서 그 나름의 방식을 발전시켜왔다. 때로는 실사 영화적 기법으로부터 때로는 전통적 애니메이션 기법, 그리고 디지털 기술합성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테크놀로지와 전통적 ‘손(手)’의 기법을 여전히 주요한 가치로 삼으면서 말이다. 물론 김강민 감독의 본 작품도 이러한 경계 이상에 위치한 놀라운 작품이다.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향연 또는 병치는 지면상 언급하지 못한 다른 다양한 미학적 성과들과 함께 스톱모션이라는 이미지의 또 다른 경계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의 후속작이 기대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38-39°C> 전편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rRS1yhIhEHQ
<38-39°C> 메이킹 영상: https://vimeo.com/26085766
차기작 <사슴꽃> 트레일러: https://www.youtube.com/watch?v=MfX9BE8BT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