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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세친구

임순례,1996

[한국영화걸작선]세친구 대표 이미지
거의 19년 만에 <세친구>(1996)를 다시 보았다. <세친구>를 떠올릴 때면 자동적으로 임순례의 단편 <우중산책>(1994)과 박찬옥의 단편 <느린 여름>(1998)을 연결하는 버릇이 있었다. 몇 번인가 글에도 썼던 것 같다. 그런데 다시 본 <세친구>는 기억과 많이 달랐다. 호흡이나 느낌에서 다른 부분이 많이 보였다. <우중산책>의 길게 찍기는 <세친구>에 와서 줄었고, 단편의 멜랑콜리한 부분은 장편에 와 거의 다 제거되어 있다. <느린 여름>처럼 한 시기를 보내는 남자아이들의 기운을 담고는 있으나, <세친구>는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따라간다기보다 툭툭 던지는 식이다. 나는 왜 <세친구>가 테이크를 길게 가면서 감정의 전달에 충실을 기한 작품이라고 기억했던 것일까. 알 수는 없다. 전작이 그랬으니까 그 인상을 연장했을 수도 있고, 당시 나의 심리 상태가 세 인물의 처지에 격하게 반응했을 수도 있다. 

대충 세 봐도 <세친구>의 신scene 수는 예순 개를 훨씬 넘는다. 상영 시간은 90분 정도다. 졸업식을 치르는 학교와 변두리 중국집에 이어 등장하는 공간은 비디오방이다. 티브이 앞에 나란히 앉은 삼겹, 무소속, 섬세는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보인다. 새까만 무대에서 얼굴 주변으로만 조명을 받으며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또한, 삼겹 역할을 맡은 이정원의 특이한 대사 연기도 그런 느낌에 일조한다. <세친구>는 조금 멍청한 세 인물이 어떤 상황과 마주했을 때 벌어지는 소극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연결해놓은 작품 같다.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인 막스 형제의 영화와 오히려 인척지간인 것 같은. 이것은 <세친구>를 우스갯거리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거리를 두고 보게 된 작품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기실 무소속, 섬세, 삼겹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많이 슬픈 것들이다. 만화가가 꿈인 무소속은 이런저런 공모전에 출품을 해보지만 매번 떨어진다. 기껏 들어온 일자리라고 해봐야 일본 만화를 베끼는 것이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잔심부름을 하는 게 다다. 어느 날, 그는 공모전에 냈던 만화의 내용이 살짝 바뀌어 잡지에 실린 걸 보게 된다. 단숨에 따지러 갔으나 법적으로 해볼 테면 해보라는 말을 듣고 무기력하게 돌아선다. 섬세는 미용사가 자기 적성이라고 생각한다. 재수를 해서라도 섬세가 대학에 가기를 원하는 엄마는 아들이 미장원 근처에 얼씬 못하게 한다. 몰래 미용 학원에 다니며 밤에는 미장원에서 연습하던 그는 동네 건달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자신을 방구석에 가둔다. 삼겹은 누가 뭐라고 하든 잠자는 것과 먹는 것에 충실하다. 막 이웃 여자들의 냄새에 유혹당해 뒤를 따라다니지만, 그녀들에게 그는 놀림감에 불과하다. 군에 가기 싫어 살을 찌워 면제를 받아내는 것까진 좋았으나, 사우나에서 아무리 버텨도 몸에 붙은 살은 떠날 줄을 모른다. 

한 번쯤은 극에 뛰어들어 함께 울 법한데, 임순례는 토닥이고 싶은 손길을 용케 꼭꼭 몸 안으로 숨겨둔다. <우중산책>처럼 <세친구>에서도 울컥하게 하는 장면은 비가 내릴 때 나온다. 엄마의 정이 그리운 무소속은 꽃집 여인을 사모한다. 그녀의 얼굴을 그린 그림과 우산을 손에 든 채 그는 골목 어귀에 서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그녀는 남편이 오자 꽃집 문을 닫고 귀가한다. 무소속은 말없이 돌아서고, 이병우의 기타 음악이 짧게 흐른다. 그림이 빗속에 떨어지고 그는 빗속 너머로 사라진다. 그게 다다. 상처를 입은 청춘의 연정이 빗속에서 우는데, 임순례의 카메라가 취하는 태도는 냉정할 정도다. 그 시기에 그런 통증은 있기 마련이고 곧 잊힐 거라고 말하려는 듯이 카메라는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않는다. 

30분께에 나오는 22초짜리 쇼트는, 그런 점에서 <세친구>를 대표하는 것이다. 세 친구가 담벼락 앞에 서 있다. 삼겹은 하품하고 무소속은 담배를 피우고 섬세는 팔짱을 끼고 섰다. 카메라는 다가서지도 않고 뒤로 빠지지도 않는 태도로 우두커니 바라본다. 카메라의 거리만큼 눈에 띄는 것은 세 인물의 배치다. 그들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친밀한 친구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평소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냥 함께 외로움을 푸는 사이로 비친다. 따져보면, 그들은 한 번도 절실한 감정을 나누지 못한다. 각각의 인물에 균등하게 시간을 할애하던 영화는 엔딩에서도 세 인물의 모습을 따로 나눠 보여준다. 삼겹은 사우나에서 살을 빼다 지쳐 쓰러지고, 섬세는 삼류극장에서 게이의 접촉에 망설이며, 무소속은 빛 바깥으로 사라진다. (제목이 ‘세 친구’가 아니라 ‘세친구’임에도) 그들에겐 함께 뭉쳐 대항할 힘이 없다. 영화는, 쉽게 물거품처럼 꺼지는 몇 개의 시도만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들의 통증을 씨실로 연결해 보여주는 것은 무소속의 귓병이다. 빗길을 걸어 귀가한 무소속은 수건으로 귀를 닦다 이상을 알아차린다. 티슈로 닦아보니 고름이 묻어 나온다. 극 중 드물게 나오는 플래시백은 염증의 시작을 밝힌다. 졸업 전, 군대 시절 이야기로 일장 연설하던 선생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무소속을 끌어내 얼굴과 귀와 몸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무소속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얼마 후, 입영 신체검사를 맡은 의무장교(임상수 감독이 연기했다)는 무소속에게 귓병이 염려스럽다고 말한다. 군에서 고문관 취급을 받는 무소속은 선임병으로부터 구타를 당하다 귀를 맞고 쓰러진다. 다음 장면에서 의가사제대를 한 그가 마을로 돌아온다. 귀가 들리지 않는 무소속은 어딘가 혼을 뺏긴 아이 같다. 카메라는,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시장통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임순례가 한 청춘에게 가해진 일련의 폭력을 기록하는 방식은 그렇다. 나서서 드러내지 않으면서 한 아이의 귓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들리지 않는 한숨으로 아파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악어>가 나온 1996년, 임순례는 <세친구>로 데뷔했다. <세친구>는 1980년대 밑바닥 청춘의 기록인 <바람 불어 좋은 날>의 1990년대 버전이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간은 지나고 바야흐로 계급의 간격이 아가리를 쩍 벌리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시간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스물로 진입하기도 전에 소외를 맛본다. 한편, 1980년대와 다를 바 없는 1990년대의 산동네 풍경을 보면서 혹시 시간을 잘못 찾아간 게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경제 성장의 정체와 별개로, 성장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동네는 어둡고 초라하다. <세친구>가 나오고 꼭 1년 뒤, 한국의 거품 성장은 붕괴하고 만다. 나른하고 건조하면서 서늘한 <세친구>는 그런 낌새를 눈치 챈 것일까.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청춘의 시간을 함부로 이용하거나 착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작가의 태도를 믿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19년의 시간이 흘렀고, 세 명의 예쁜 남자 아이들이 등장하는 <스물>이라는 영화가 올해 개봉돼 인기를 끌었다. 외형적인 건 차치하고 <세친구>와 <스물> 사이에서 제일 드러나는 건 태도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인상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세친구>를 지지하고 싶은 것은 그 태도가 지금도 의심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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