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동굴속의 애욕
강범구,1964
영화사가 이영일은 스릴러-액션 영화가 1963년에서 67년까지 5년간, 한국 영화제작의 “주조가 되다시피 했다”고 썼다. 하지만 당대에 누린 상당한 인기나 산업적 파급력에 비한다면 이 장르에 대한 후대의 관심은 그다지 큰 편이 못된다. 이만희나 정창화 같은, 이 장르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이 연출한 몇몇 영화가 작가주의적인 맥락에서 조명되거나 합작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로 거론되는 정도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회고전 이후 작가로서 재조명된 정창화 감독의 작품들은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여전히 한국영화사에 대한 작가주의적인 접근이 지배적인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해당 시기 스릴러-액션 영화의 대표작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오랫동안 장르 영화를 폄하하는 시선을 견지해왔던 한국영화 비평담론에 의해 그저 그런 상업영화로 치부되었던 스릴러-액션 장르는 대표적인 영화들이 사라짐으로 해서 재평가를 받을 기회마저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범구 감독은 매우 불운한 경우다. 1964년 당시 이만희, 김수용과 함께 “현역 젊은 감독의 대표선수 격”으로 꼽혔던(경향신문, 1964년 7월 13일) 강범구 감독은, 그러나 문예영화 붐을 이끌면서 영화작가로 입지를 굳혀간 이만희, 김수용과는 달리 상업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남았다. 문예영화 감독이 되지 않거나 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스릴러-액션 영화 장르에서 아주 잘 팔리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들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 영화들이 ‘국제적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탓이었다. <검은 꽃잎이 질 때>(1962) <안개 낀 거리>(1963) <창살 없는 감옥>(1963) <유랑극장>(1963) 등이 대만과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되었고 그는 곧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의 영화감독이 되었다. 1966년 그가 한국-대만 합작영화 <탈출명령>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작들이 대만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강범구 감독의 네 작품은 1963년과 64년 사이에 대만과 동남아시장을 묶어 작품당 만 달러에 수출되었다. 같은 시기에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5천 달러를 받고 일본시장에 판매되었음을 상기해보면, 이것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성공적인 해외시장 진출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만으로 보내진 것이 영화의 원판이었다는 데 있었다. 강범구 감독에 따르면 대만은 원판과 프린트를 가리지 않고 작품 편수에 따라 관세를 매겼기 때문에 대만 쪽에서는 원판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대만과 동남아 시장을 포괄할 여러 벌의 프린트를 한국에서 만들어 내보내는 것보다는 원판을 가져가 대만에서 만드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1964년 작 <동굴 속의 애욕>과 <소만국경> 두 편뿐이다.(물론 1960년대 말 이후의 영화들은 몇 편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 장르영화의 전성기이자 감독 강범구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의 영화 가운데는 이 두 편만이 남아 있다.) 사라져버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당대의 평가가 높지 않았던 이 영화들을 통해서도 감독의 솜씨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굴 속의 애욕>은 권순영 판사가 춘천지방법원에 있을 당시 재판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쓴 이른바 ‘법정 수기’가 원안이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의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악명 높은 판결문을 남긴, 이른바 ‘박인수 사건’의 담당 판사가 바로 권순영이었다. 그는 박인수 사건 재판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그 해에 「법창(法窓)의 봄」(정문사, 1955)이라는 수필집을 내놓았다. 그 책에는 그가 판결을 맡았던 사건들의 내막이 때로는 소설 형식으로, 또 때로는 수기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원안 <동굴 속의 애욕>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의 땅이 되었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반도의 많은 지역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과 국방군이 번갈아 지배했던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산(山)사람’, 이른바 빨치산이 되어야 했다. 적군에게 협력한 전력이 드러나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가 그들을 산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 살인사건의 세 주인공인 유동록과 안태선, 그리고 이옥녀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공산치하의 마을에서 리(里) 세포위원장으로 권세를 누리던 동록은 태선의 아내 옥녀를 겁탈한다. 세 사람의 치정에 얽힌 관계는 9.28수복 이후 북으로 진격해오던 국방군이 마을을 점령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동록의 동생 동관과 그의 애인이자 여맹위원장인 정숙, 그리고 세 사람은 국방군을 피해 대성산 산마골의 동굴로 숨어들고, 그곳에서 그들의 ‘짐승 같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그곳에서 옥녀의 마음은 점차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남편 대신 억세고 강인한 동록에게 기울어간다. 사건의 폭발은 태선이 마을로 내려가 자수하겠다고 하면서 시작된다. 옥녀는 인민군에 나간 전력을 가진 남편이 자수한 뒤에 겪게 될 불안한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의 공포를 잠재워줄 억센 팔을 가진 동록을 택한다. 그녀는 태선의 자수 의사를 은근슬쩍 정숙에게 흘리고 정숙은 이를 곧바로 동록에게 고발한다. 인민재판을 통해 동록은 태선을 반동으로 낙인찍고 낫으로 그를 살해한다.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에 ‘짐승과도 같은 빨치산의 생태’ 류의 제목을 달고 실렸을 법한 이야기, 또는 얼핏 1950년대의 <피아골>을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강범구 감독의 영화에 와서 법정드라마의 외피를 입으며 전혀 다른 질감을 확보했다. <검사와 여선생>에서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 이르는 한국 법정드라마들은 그 장르 특유의 심문(審問)의 형식을 기구한 운명을 감당한 여인네들의 고백의 장치로 흔히 활용하곤 했다. 죄지은 여성의 억울한 사연에 대한 공감이 차가운 법의 논리를 압도하면서 흥건한 눈물이 법정을 채우는 것이 한국 법정드라마의 관습이었다. <동굴 속의 애욕>은 그런 면에서 예외적인데, 이는 비정한 도시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능숙하게 다뤄온 강범구 감독의 영화적 수완이 발휘된 결과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순간의 정황이 동록의 자백으로 먼저 재현되고, 이후부터 검사의 논고와 피고의 자백, 그리고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간부(姦夫)와 내통하여 남편을 죽였다는 이 치정 살인사건은 조금씩 그 내막을 드러낸다. 법정드라마의 장치들은 이야기의 정보들을 적절히 안배하고 그로부터 서스펜스와 스릴을 만들어내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여러 명의 화자(話者)가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은, 그 사건에 연루된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며 정부(情婦)의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한 동록조차도 절대적인 악의 화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로 그려지도록 한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옥녀의 증언 거부가 이야기 정보를 지연시키는, 서스펜스 영화의 고전적인 장치도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재판이 벌어지는 현장의 관객 역시 정서적 공감을 자아내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는데, 특히 신문기사로 사건을 접하고 호기심을 느껴 법정을 찾아가는 젊은 부부를 배치한 것은 탁월한 설정이다. 전계현과 방수일이 맡은 이 부부는,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은 짧지만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사건을 소개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도록 한다. 전계현은 옥녀의 마지막 진술을 듣고 난 후에 “다른 사람들은 저 여자를 미워할지 모르지만 전 동정해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 사건에 대한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후 남한사회가 품어야 했을 수많은 이적행위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가(물론 현실 속에서는 관철되지 못했지만) 그려지는 순간이라고 하겠다.
3선 개헌에서 유신체제의 출범으로 이어지는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정세 속에서 한국사회는 점점 더 경직되고 억압적으로 되어갔다. 이와 비례하여 한국영화에서 ‘반공’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범될 수 없는 영역으로 공고해졌다. 인민군의 묘사를 문제 삼아 감독 이만희를 구속까지 했던 <7인의 여포로> 사태 이후에, 많은 영화감독, 비평가들이 반공의 이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공산주의자의 재현에 유연성을 보여줄 것을 검열 당국에 호소하곤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도시범죄에 한국전쟁의 경험이나 간첩의 소재를 활용했던 스릴러-액션 장르는 1960년대 후반이 되면 공산주의자의 비인간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철저한 반공영화로 변모하면서 점차 대중의 공감을 잃어갔다. 강범구 감독의 <동굴 속의 애욕>은 그 이전, 그러니까 한국의 장르 영화들이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고 때로는 사회의 통념에 도전할 수도 있었던, 그럼으로써 장르 영화의 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대의 수작(秀作) 가운데 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