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장호,1987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부모형제들과 고향을 잃었다. 이제하의 원작을 각색한 이장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알레고리와 은유를 통해, 한국전쟁의 비극과 분단의 상처를 그려낸 영화이다.
계해년(1983)이 저무는 12월 중순, 순석은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의 유골 가루를 갖고 속초에 도착한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출세를 위해 갖은 고생을 감내하며 병마에 시달리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의 아내가 “고향이 원산은 아니라오”라고 했던 말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다. 여기서 그는 죽음이 임박해 한사코 고향으로 가려는 노인과 마주친다. 강원도의 비무장 지대 어디쯤으로 추정되는 노인의 고향 월산은 분단 상황에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노인은 간호사 영숙을 조르고 졸라 북쪽으로 향한다. 노인의 아들은 “남쪽에서 자수성가했으니 이제 남쪽이 고향”이라고 주장한다. 아들의 반대로 노인의 바람이 끝내 좌절될 때, 영화화면은 노인의 기억 또는 상상을 따라 그의 고향으로 나아간다. ‘통일의 길’이라는 표지석을 지나, 끊어진 다리를 지나,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을 지나, 마침내 고향 월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순석이 돌아다니는 현실의 이곳은 금지의 공간이다. 바닷가에는 초병이 소총을 겨누며 검문을 하고, 차도에는 바리케이트가 즐비하다. 또한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 또 다시 대설주의보가 내려지는 공간이다. 눈 덮인 공간에서 사람들의 이동은 제한되고, 서로 고립된다. 뿐만 아니라 순석이 만난 두 명의 매춘여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실 노인과 순석은 아무 사이도 아니며 어떤 접점도 없다. 그러나 노인의 ‘실향’과 순석의 ‘상처(喪妻)’를 통해, 영화는 기이한 접점을 만든다. 다시 말해서 분단으로 인한 노인의 상처가 순석에게로 전이된다. 여기에 더해 순석 앞에 펼쳐지는 한국전쟁의 한 장면과 “김일성은 죽어야 된다”고 끝없이 반복하는 청년과 하늘을 나는 까마귀 떼는 한국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한국전쟁의 상처와 레드콤플렉스가 각인된 대한민국의 한 공간에서, 순석은 점쟁이의 예언처럼 ‘물가에서 관 셋을 짊어진 사내’가 된다. 그것은 자살로 추정되는 아내의 죽음과 또 다른 죽음들에 대한 그의 깊은 죄책감을 나타낸다. 노인에게 일종의 매춘행위를 했던 간호사 영숙 또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린다. 순석이 영숙의 전생의 남편이라고 했던 점쟁이의 예언에 따라, 그들은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죄책감을 둘러싼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그들은 급속히 가까워진다. 이제 사랑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러면 두 사람은 괜찮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겨울이며, 급사한 영혼들이 떠도는 죽음의 공간이다. 순석이 여관 앞마당에 아내의 유골 가루를 뿌리기는 했지만, 그 죽음(들)을 애도하지 못하면 두 사람의 행복한 미래는 불가능하다. 순석은 먼저 서울로 가서 영숙을 기다리기로 하고 배를 타러 간다. 이때 강가에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굿이 펼쳐지고 있다. 순석의 배가 떠나갈 때, 굿을 구경하고 있던 영숙은 갑자기 신내림을 받는다. 비로소 애도는 시작되지만, 영화 첫 장면에서 함께 눈길을 걸었던 두 사람은 이산가족처럼, 남북의 분단처럼, 끝내 헤어지게 된다. 순석은 다시 아내가 될 여자를 잃고, 영숙은 다시 전생의 남편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작업이었다. 그러나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분단 상황에서 애도는 불가능했다. 수행되지 않은 애도는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그에 따른 후유증도 해소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서,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의 다음 세대인 순석은 관 셋을 짊어진 채 떠돌아다니고, 영숙은 애도작업으로서의 씻김굿을 수행하게 된다. 무당이 되어가는 그녀를 보며 경악하는 순석의 눈앞에 거대한 손바닥이 나타난다. 어지럽게 엇갈리는 손바닥의 금들은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