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흙
김기영,1978
1978년에 춘원 이광수의 계몽소설 「흙」이 세 번째로 영화화된다. 「흙」은 1960년(권영순 연출)과 1967년(장일호 연출)에 이미 영화화된 바 있었고, 원작의 명성과 성실한 만듦새에 힘입어 두 번 다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광수 원작’의 ‘계몽적인 주제’라는 요소는 국가가 권장하는 우수영화의 작품성을 담보하는 것이었기에 <흙>은 으레 보상을 받고 해외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그러니 국책으로 민족계몽이 장려되던 1970년대에 이 소설이 다시 영화화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연출자가 김기영 감독인 것은 의외의 일일 수 있었다. 김기영 감독의 필모그래피로 보건대, 춘원 원작이 지닌 주제의식과 그의 영화 세계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아주 흥미로운 결과를 낳게 된다. 「상록수」와 더불어 민족계몽소설의 상징과도 같은 「흙」이 김기영 감독의 손을 거치자 오히려 민족계몽을 해체하는 기묘한 애정심리극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근대문학의 문호이자 공산군에게 끌려간 반공지사 춘원의 계몽소설을 원작으로 했음을 내세우며, 당시 정권이 선호하는 농촌계몽을 통한 근대화와 민족의식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프닝의 첫 자막이 “원작 이광수의 흙”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러한 표지이다. 그것은 국책에 부응하는 문예영화이자 계몽영화로 보이는 전형적인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가 시작되자 민족주의의 핵을 이루는 가부장적 아비부터 부정된다. 허숭이 야학에서 돌아와 유순을 생각하며 정선과 비교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허숭 아버지의 장례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아버지의 나팔을 두고 “나팔을 불든가 형무소 가는 ‘바보짓’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한 어머니의 유언을 허숭이 되뇌는 것을 통해 다시 확인된다.
이후 윤 참판 집으로 들어가 그 집 사위까지 되는 허숭(김정철)의 행보는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다. 그러나 허숭의 동기와 내면에 대한 해석 면에서 영화는 원작이 표방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사실 원작에서 허숭은 모순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정선과 유순에 대한 태도에서 그의 이중성과 위선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그러한 허숭을 끊임없이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것은 원작의 서술자이다. 그리고 그러한 서술자의 태도는 결국 모든 인물들이 허숭을 숭상하며 그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교화되는 ‘계몽적인’ 결말을 이끌어낸다. 이와 달리 영화에서는 허숭의 욕망이 날것 그대로 노출되면서 허숭은 야심만만한 ‘촌놈’으로 표상된다. 윤 참판 집 문간방에서 고시공부를 시작한 허숭은 “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변호하고 싶다”고 피력하면서 한편으로는 ‘문간방에서 안방까지’ 올라가기로 결심한다. 두 가지 목표는 모순이나 위선이 아니라 ‘촌놈’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순치될 수 있는 야망이다. 그래서 영화 속 허숭은 원작에서보다 오히려 일관성 있고 생동감 있는 캐릭터가 된다.
이는 허숭이 여자들과 맺는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영화에서 허숭은 유순(염복순)에 대해 오해받을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허숭에게 첩으로라도 삼아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당돌한 유순이다. 그리고 그녀가 허숭의 첩이 되고자 하는 것도 연심(戀心)에서라기보다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원초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허숭은 유순에게 별다른 관심 없이 데면데면한 것이기도 하다. ‘촌놈’으로서 야망을 향한 의지가 강한 허숭의 지향은 ‘서울 여자’에게 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 참판 집 주인이 되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는 이미 ‘서울 여자 정선’이 들어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촌놈 허숭과 서울 여자 정선의 처절한 멜로드라마가 전면화된다.
그런데 허숭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정선 캐릭터이다. 영화 속 정선은 소설에서처럼 허숭에 의해 정복되고 교화되는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안 해도 좋으니 일생동안 붙어서 자신을 즐겁게 해줄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고, 친일파를 일러 “그거 다 뛰어난 사람들”이라며 자신은 이념이나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잘 살고 싶다고 외친다. 그녀는 김갑진의 아이를 배고도 허숭 앞에서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고, 오히려 이혼해주지 않는 허숭과 이혼하기 위해 친구에게 남편을 유혹해달라고 제의한다. 그녀는 서울 귀족으로서의 우월감이 대단한 데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원래 가진 욕망과 성격은 ‘플루트’로 상징된다. 허숭이 결혼하자마자 정선이 플루트 연주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그녀의 욕망과 성격이 허숭의 가부장적 권위에 반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 영화의 갈등구조는 이러한 ‘정선의 플루트’와, 앞서 언급한 ‘허숭 아버지의 나팔’이 함축하고 있다. 허숭은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새기면서도 결국 아버지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부장으로서 정선도 장악하고 농촌도 계몽하려고 했으며 일본 검사 마사키와의 대결에서도 이기려고 했다. 그 결과 그는 아내와 거리가 멀어졌고, 농촌에 머물지 못하고 피고가 되어 법정에 서야 했으며, 형무소에 가야 했다. 마찬가지로 정선은 촌놈 허숭에게 호기심과 더불어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매혹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불쾌해 하며 인정하지 못했다. 처음 만난 허숭에게 “결혼하시면 부인을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교회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사탄, 마귀’라고 과도하게 힐난하는 것은 그녀의 이중적 욕망을 잘 보여준다. 정선이 다리를 잃게 되는 것은 자신의 모순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나팔과 플루트의 갈등이 허숭과 정선의 애증으로 드러나며 극단적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심리적 긴장과 기묘한 박진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서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원작과 달라질 뿐만 아니라 김기영식 전유가 발생한다. 형무소에서 피폐해진 몸으로 출감한 허숭은 나팔을 가리켜 “이것 때문에 5년을 살았다”며 과거 자신의 ‘영웅적’ 행동을 후회하고 부정한다. 그리고 정선에게 이혼을 승낙하고 떠나려 한다. 이때 정선이 “3년 이상 별거하면 이혼이 성립되는 것”이니 이미 이혼 승낙은 의미 없다고 말하고는, 나팔로 ‘올드 랭 사인’을 불어 허숭을 돌아오게 한다. 이로써 <흙>은 전통적 가부장의식과 근대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남녀가 부부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성장한 인간의 행동에는 남녀 개인의 자존과 상호 존중에 입각한 협의가 들어있다. 허숭이 자신의 핏줄이 아닌 정선의 딸을 업고 집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해피엔딩을 넘어 1970년대 영화로서 매우 남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김기영의 <흙>이 제작된 1970년대 말은 가부장적 권력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이미 가부장적 권위는 무너진 시대이자 여성의 순결에 집착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순결의 훼손을 관음하는 것을 통해 못난 남성성을 위로하는 ‘방화’가 판치던 시기였다. 이때 그 모순된 남성성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춘원의 민족계몽소설이 김기영 감독의 손을 거치며 관념적이고 위선적인 계몽의 외피가 벗겨진 채 시골 남자와 서울 여자의 적나라한 욕망과 개인의식의 치열한 각성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로 거듭난 것은 의미가 깊다. 여기에 1970년대 영화의 반어적 수사학과 그로 인한 의외성의 의의가 있기도 하다. 요컨대 <흙>은 정부가 권장하는 ‘문예’와 ‘민족계몽’을 외피로 삼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오히려 그것에 반하여 그것을 해체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그러한 점에서 ‘청년의 명랑’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어떤 영화보다도 우울했던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이나 <어제 내린 비>(이장호, 1974)와 동궤를 이루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근대문학의 문호이자 공산군에게 끌려간 반공지사 춘원의 계몽소설을 원작으로 했음을 내세우며, 당시 정권이 선호하는 농촌계몽을 통한 근대화와 민족의식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프닝의 첫 자막이 “원작 이광수의 흙”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러한 표지이다. 그것은 국책에 부응하는 문예영화이자 계몽영화로 보이는 전형적인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가 시작되자 민족주의의 핵을 이루는 가부장적 아비부터 부정된다. 허숭이 야학에서 돌아와 유순을 생각하며 정선과 비교해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허숭 아버지의 장례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아버지의 나팔을 두고 “나팔을 불든가 형무소 가는 ‘바보짓’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한 어머니의 유언을 허숭이 되뇌는 것을 통해 다시 확인된다.
이후 윤 참판 집으로 들어가 그 집 사위까지 되는 허숭(김정철)의 행보는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다. 그러나 허숭의 동기와 내면에 대한 해석 면에서 영화는 원작이 표방하는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사실 원작에서 허숭은 모순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정선과 유순에 대한 태도에서 그의 이중성과 위선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그러한 허숭을 끊임없이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것은 원작의 서술자이다. 그리고 그러한 서술자의 태도는 결국 모든 인물들이 허숭을 숭상하며 그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교화되는 ‘계몽적인’ 결말을 이끌어낸다. 이와 달리 영화에서는 허숭의 욕망이 날것 그대로 노출되면서 허숭은 야심만만한 ‘촌놈’으로 표상된다. 윤 참판 집 문간방에서 고시공부를 시작한 허숭은 “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변호하고 싶다”고 피력하면서 한편으로는 ‘문간방에서 안방까지’ 올라가기로 결심한다. 두 가지 목표는 모순이나 위선이 아니라 ‘촌놈’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순치될 수 있는 야망이다. 그래서 영화 속 허숭은 원작에서보다 오히려 일관성 있고 생동감 있는 캐릭터가 된다.
이는 허숭이 여자들과 맺는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영화에서 허숭은 유순(염복순)에 대해 오해받을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허숭에게 첩으로라도 삼아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당돌한 유순이다. 그리고 그녀가 허숭의 첩이 되고자 하는 것도 연심(戀心)에서라기보다는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원초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허숭은 유순에게 별다른 관심 없이 데면데면한 것이기도 하다. ‘촌놈’으로서 야망을 향한 의지가 강한 허숭의 지향은 ‘서울 여자’에게 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 참판 집 주인이 되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는 이미 ‘서울 여자 정선’이 들어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촌놈 허숭과 서울 여자 정선의 처절한 멜로드라마가 전면화된다.
그런데 허숭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정선 캐릭터이다. 영화 속 정선은 소설에서처럼 허숭에 의해 정복되고 교화되는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안 해도 좋으니 일생동안 붙어서 자신을 즐겁게 해줄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고, 친일파를 일러 “그거 다 뛰어난 사람들”이라며 자신은 이념이나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잘 살고 싶다고 외친다. 그녀는 김갑진의 아이를 배고도 허숭 앞에서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고, 오히려 이혼해주지 않는 허숭과 이혼하기 위해 친구에게 남편을 유혹해달라고 제의한다. 그녀는 서울 귀족으로서의 우월감이 대단한 데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원래 가진 욕망과 성격은 ‘플루트’로 상징된다. 허숭이 결혼하자마자 정선이 플루트 연주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그녀의 욕망과 성격이 허숭의 가부장적 권위에 반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 영화의 갈등구조는 이러한 ‘정선의 플루트’와, 앞서 언급한 ‘허숭 아버지의 나팔’이 함축하고 있다. 허숭은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새기면서도 결국 아버지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부장으로서 정선도 장악하고 농촌도 계몽하려고 했으며 일본 검사 마사키와의 대결에서도 이기려고 했다. 그 결과 그는 아내와 거리가 멀어졌고, 농촌에 머물지 못하고 피고가 되어 법정에 서야 했으며, 형무소에 가야 했다. 마찬가지로 정선은 촌놈 허숭에게 호기심과 더불어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매혹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불쾌해 하며 인정하지 못했다. 처음 만난 허숭에게 “결혼하시면 부인을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교회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사탄, 마귀’라고 과도하게 힐난하는 것은 그녀의 이중적 욕망을 잘 보여준다. 정선이 다리를 잃게 되는 것은 자신의 모순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나팔과 플루트의 갈등이 허숭과 정선의 애증으로 드러나며 극단적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심리적 긴장과 기묘한 박진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서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원작과 달라질 뿐만 아니라 김기영식 전유가 발생한다. 형무소에서 피폐해진 몸으로 출감한 허숭은 나팔을 가리켜 “이것 때문에 5년을 살았다”며 과거 자신의 ‘영웅적’ 행동을 후회하고 부정한다. 그리고 정선에게 이혼을 승낙하고 떠나려 한다. 이때 정선이 “3년 이상 별거하면 이혼이 성립되는 것”이니 이미 이혼 승낙은 의미 없다고 말하고는, 나팔로 ‘올드 랭 사인’을 불어 허숭을 돌아오게 한다. 이로써 <흙>은 전통적 가부장의식과 근대적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남녀가 부부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성장한 인간의 행동에는 남녀 개인의 자존과 상호 존중에 입각한 협의가 들어있다. 허숭이 자신의 핏줄이 아닌 정선의 딸을 업고 집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해피엔딩을 넘어 1970년대 영화로서 매우 남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김기영의 <흙>이 제작된 1970년대 말은 가부장적 권력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이미 가부장적 권위는 무너진 시대이자 여성의 순결에 집착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순결의 훼손을 관음하는 것을 통해 못난 남성성을 위로하는 ‘방화’가 판치던 시기였다. 이때 그 모순된 남성성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는 춘원의 민족계몽소설이 김기영 감독의 손을 거치며 관념적이고 위선적인 계몽의 외피가 벗겨진 채 시골 남자와 서울 여자의 적나라한 욕망과 개인의식의 치열한 각성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로 거듭난 것은 의미가 깊다. 여기에 1970년대 영화의 반어적 수사학과 그로 인한 의외성의 의의가 있기도 하다. 요컨대 <흙>은 정부가 권장하는 ‘문예’와 ‘민족계몽’을 외피로 삼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오히려 그것에 반하여 그것을 해체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그러한 점에서 ‘청년의 명랑’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어떤 영화보다도 우울했던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이나 <어제 내린 비>(이장호, 1974)와 동궤를 이루는 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