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초보 시나리오 작가가 알게 된 것들
출발은 최초의 관객이었다. 친분이 있던 어느 프로듀서의 소개로 만나게 된 ‘그’ 독립영화 감독은 독특했다. 삭발한 헤어스타일도 강렬했지만, 그와 달리 수줍고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말투와 행동은 강렬했던 데뷔작과는 영 딴판이었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된 그의 영화를 보고선, 영화 관계자가 아닌 한 명의 관객으로서 그를 응원하게 됐다. 이후 만남과 통화가 잦아졌고, 그 이후로 데뷔작은 물론 이미 프리 프로덕션 중이었던 차기작 시나리오에 대해, 데뷔작의 배급 상황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2015년 겨울, 부산 송정 일대에서 조촐한 규모의 스태프들과 고군분투하며 촬영을 진행했던 두 번째 작품의 촬영 현장으로 응원을 갔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해 봄, 두 번째 영화를 완성한 그 감독은 어느 날, 세 번째 작품의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과 캐릭터, 주제들을 들려줬다. 일종의 첫 번째 관객이라고 할까. 이미 그는 내가 시나리오 작업에 관심이 많으며, 몇 년 전 공모전에 내려다 결국 완성을 못 하고 접은 시나리오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던 차였다. 일종의 3부작이지만 분명 전작들과 다른 형식과 인물들에 열띤 호응을 보내자, 그 감독은 “그럼 함께 써보자” 라고 제안했다.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경력보다는 공감과 소통, 함께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인간적인 여지를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016년 겨울, 그 감독이 들고 있던 두 장 남짓한 시놉시스는 내 손에 의해 초고로 완성됐고, 3~4고와 감독고를 거쳐 촬영에 들어갔다(그 사이사이 ‘독립영화’의 녹록지 않은 과정은 다 아실 테니 생략한다).
그 이후는 역시나 인연이었다. 그 감독과 친구 사이라 할 수 있는 한 상업영화 프로듀서가 시나리오 작업이 끝난 걸 알고는 공동 각본을 제의해 왔고, ‘초고’ 작업을 목표로 바로 계약을 했다. 이미 기자로서 내가 어떤 글을 써왔는지도 알고, 술자리도 가져 본 정직한 성품의 중견 프로듀서였다. 그가 개발 중이던 원작 실화소설을 바탕으로 함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긴 분량의 트리트먼트를 쓰고 이를 초고로 쓰는 작업에 3개월 반이 소요됐다. 수십 억대 예산이 필요한 기획 상업영화인지라, 3막 구성이나 주인공 영웅 캐릭터의 심리 묘사, 명확한 기승전결 구조를 만드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라기보다 막막하고 힘들 때가 많았다. 이게 맞나 싶을 때도, 다음 신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막힐 때도 많았지만 그야말로 협업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약속한 시간에서 2주가 흐른 뒤에야 ‘END’를 찍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초고’인지라 앞날은 기약할 수 있지만, 공동 각본의 이점과 초고가 지닌 가능성을 믿기로 했다. 분명 상업영화로서, 캐릭터 드라마로서 가능성이 명확한 이야기이기에.
그러는 사이, 기자로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송곳>의 최규석 작가가 그러지 않던가.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고. 제아무리 10여년간 여러 감독/PD/제작자 등 영화인들과 만나 “시나리오가 중요하다”, “시나리오 작가도 다양해지고 처우도 달라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함께 했지만, 직접 부딪치며 작가로서 듣고 보는 환경은 분명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배움의 시간이었지만 시야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
먼저, ‘기획개발’의 중요성. “기본이지 않느냐”는 핀잔이 들리지만, 그 기본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와 함께 한국영화에서 ''멸종''되다시피 한 ‘기획개발비’의 필요성 또한. 사실 이건 새롭게 ‘느낀 것’이라기보다 다시 ‘확인한 것’에 가깝다. 평소 친분 있던 PD나 제작자, 감독들은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는 얘기에 트리트먼트 작업을 포함한 ‘기획개발’의 중요성을 강조 또 강조하곤 했다. 개인적으론, 기획개발이 이리 힘든데, 촬영과 후반 작업, 배급홍보까지는 또 얼마나 멀고 힘든 길인가를 깨닫는 시간이었음은 물론이다.
둘째, 믿을 수 있는 공모전의 소중함. 소규모 공모전은 아예 내지 말라고 단단히 충고했다. 상금 얼마에 소중한 시나리오나 아이템만 뺏기는 예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그 제작자는 그러면서 대규모 시나리오 공모전을 진행 중인 배급사가 빨리 흥행작을 내놓아야 한다며 걱정하기까지 했다. 확실히 영화화가 보장된 믿을 만한 공모전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중국 자본이 새로운 공모전을 신설했고, 여전히 중소규모의 시나리오 공모가 1년 내내 진행 중이지만, 영화화의 길까지는 멀고 불확실한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시나리오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는 일이 어려운 것이고.
셋째, 여전히 한국영화계는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선호한다. ‘왜’에 대해선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연출자를 구해야 하는 시나리오를 써본 터이기도 하지만, 투자사나 제작사 모두 이미 검증된 감독이나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연출까지 할 감독에게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절감하게 됐다고 할까. 제작자나 감독 입장에선 “좋은 시나리오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거나 “직접 쓰고 싶지 않다”고 이구동성 외치지만, 영화판 전체의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니까. 이상론과 현실론 사이, 왜 시나리오 작가들이 드라마 쪽으로 빠질 수 없는가에 대한 답을 봤다고 할까.
그리하여, 시야는 더 넓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글솜씨는 그대로인 것 같다. 그 사이, 유명 한국소설의 원작을 각색하기로 계약을 마쳤다. 내년 1월까지 마치는 작업이다. 또 한 번, 새로운 이야기의 세계에 빠지고, 인물들의 대사를 직접 만들고, 대중적이면서도 새로운 구성을 만들어야 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모든 시나리오 작가 선배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아, 그리고 한창 촬영 중인 ‘그 독립영화’ 감독은 <들꽃> <스틸 플라워>의 박석영 감독이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지원작으로 선정된 세 번째 작품 <재꽃>이 마지막 촬영까지 무사히 마무리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