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영화리스트
뱀의 포옹
치로 게라, 2015
1.
영화에 대한 논의는 항상 ‘보는 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가진다. 영화적 경험에서 보는 이는 존재하는 이와 동일하다. 그리고 본다는 행위는 앎과 감정, 행위를 매개하며 이를 통해 발생하는 심리적, 감정적 긴장은 영화가 제공하는 쾌락과 미적 경험뿐 아니라 미학적, 정치적 역사기술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이는 광학-카메라가 내포하는 소위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과 명백한 인과율 그리고 그 세계에서 구성되는 통일적 주체라는 허구가 아니라, 사건(이미지)들의 발생과 연쇄를 즉각적으로 대면하고 반응하는 ‘끊임없는 변화 속의 주체(관람자)’ 경험을 통해 파악된다. 요컨대, 영화가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미학적 역사기술은 속박되지 않는 이미지, 그리고 안전한 관찰자의 자리를 박탈당하는 ‘보는 이’라는 이미지-시각 동학의 재구성이라는 방법론을 가질 때 비로소 권력의 시선에서 제공되는 연대기와 인과율을 벗어나 대항-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치로 게라의 <뱀의 포옹>은 영화-역사-정치가 절합(articulation)되는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영화는 신비한 효능을 가진 전설의 약초 야크루나(yakruna)를 찾는 독일 탐험가 테오와 그의 원주민 안내자인 만두카, 그리고 이들을 야크루나로 안내하게 될 젊은 무속인 카라마카테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카라마카테는 자기 종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폭압의 대상인 서구인 테오를 돕기 거부하고 서구적 관습을 흡수한 종족의 정보제공자(native informer) 만두카를 경멸하지만, 살아남은 종족의 생존을 돕겠다는 테오의 제안에 마지못해 두 사람과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 이어서 영화는 40여 년을 뛰어넘어 노인이 된 카라마카테와 야크루나를 찾으려는 미국인 에반스의 또 다른 만남을 보여주면서, 두 명의 서구인 탐험가가 떠나는 상이한 시간의 여정을 카라마카테의 존재를 통해 느슨하게 병치시킨다. 경이에 가까운 아름다움과 날것의 이미지가 자아내는 공포가 공존하는 아마존의 풍경은 그러나 서서히 원주민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식민권력의 폭력적 현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의 여행자들은 천연고무 착취를 위한 원주민 학대나 원주민 아동들을 교화시키는 가톨릭 신부의 포악한 이면 등 서구 식민권력의 경제적, 문화적 폭력을 재현하는 장면들과 조우한다. 이 잔인한 식민지배/피지배의 무대에서 영화의 여행자들은 갈등하고 충돌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이어가면서 야크루나라는 목적을 향한 여정을 지속한다.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 리차드 에반스 슐츠
2.
실제로 19세기 독일인 탐험가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Theodore Koch-Grunberg)와 20세기 미국인 식물학자 리차드 에반스 슐츠(Richard Evans Schultes)라는 실존인물들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은 <뱀의 포옹>은 식민문학의 대표적 양식인 여행기(travelogue) 서사와 긴밀한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고 있다. 프론티어리즘에 입각한 서구적 영웅 서사와 기독교적 훈육제도, 공간이동 및 자연착취의 영역을 확대시킨 과학기술과 박물학, 휴머니즘과 이국애증, 제국주의적 욕망과 부르주아적 개인성에 바탕을 둔 여행기 양식은 유럽 식민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노골적인 얼굴이다. 그러나 여행기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착취에 기반한 지배/피지배라는 적대적 이분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여행기 양식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 전통과 가치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기술자가 경험하는 긴장의 양태들인데, 이는 종종 기존의 제국주의 서사의 관습과 충돌하는 반-정복(anti-conquest) 서사와 연결된다. 그러나 반-정복 서사는 제국주의적 정복 서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헤게모니를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결백을 지켜내고 싶었던 유럽의 부르주아 주체들이 활용한 재현 전략”(메리 루이즈 플랫)이다.
<뱀의 포옹>이 서구 여행기 양식과 관련되는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가 유럽 제국주의와 맺고 있는 공모관계의 폭로라는 것이다. 영화는 테오/에반스와 카라마카테, 그리고 원주민들로 형상화되는 식민지배/피지배, 여행자/여행되는 자(travelees)라는 단순한 대립을 넘어 상이한 신념과 언어, 지식과 감정이 만나는 접촉 지대(contact zone)에서 발생하는 훨씬 복잡한 동학을 제시한다. 영화 중반의 고무나무밭 장면은 서구 자본과 (서구화된 콜롬비아인으로 제시되는) 서구 제국의 내적 주체(domestic subject), 그리고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원주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고무 채취와 노동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분노한 마카테가 채취된 고무액을 땅에 버리고, 이를 알게 된 원주민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를 이끄는 것은 폭압에 시달린 원주민의 팔 잘린 신체가 전달하는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테오의 유럽 휴머니즘의 정서다. 아마도 롤랑 조페의 <미션> 같은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해왔던 유럽 휴머니즘의 감정은 결국 마카테가 원주민을 자비롭게(!) 사살함으로써 설 자리를 잃은 채 훼손된다.
테오의 유럽/휴머니스트/부르주아 여행자의 정체성은 그의 여정 내내 계속하여 의문시된다.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의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보낸 테오는 호혜라는 관습과 가치를 평화롭게 습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한 원주민 아이가 그의 나침반을 가져가자 테오는 사유재산이자 (유럽의) 테크놀로지/지식을 위협/강탈한 원주민에게 적대와 폭력의 민낯을 드러낸다. 상심에 빠진 테오에게 카라마카테는 ‘지식을 독점하려는’ 백인의 태도를 꼬집고 타자(유럽)의 지식을 접촉하려는 자기(원주민)의 욕망을 변호한다. 결국 테오는 결코 ‘결백하지’ 않은 것이다. 도전받는 것은 기독교/가톨릭이라는 서구 종교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원주민 아이들을 콜롬비아 자본가 세력이나 원시적 폭력에서 보호하고 훈육하는 가톨릭 신부의 종교적 자비는 원주민 언어를 사용한 아동에 대한 가혹한 채찍 형벌이라는 폭력의 얼굴을 숨기고 있다. 한편 에반스의 여정에서 등장하는 사이비 교주의 커뮤니티는 메시아라는 일원신과 교회의 제도가 원주민들에 의해 ‘번역되는’ 또 다른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제시한다.
결국 제국주의적 정복서사나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이를 전유하는 <뱀의 포옹>의 궁극적인 전략은 유럽 중심의 다위니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로컬의 경험을 역사화할 수 있는 대안적인 ‘자가 기술 민족지(autoethnography)’의 의지를 담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유럽중심의 시각에 반하는 원시 아마존의 전통을 로컬 역사의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서구적 이성을 대변하는 테오/에반스와 원시 아마존의 철학을 들려주는 카라마카테의 부단한 대화라는 접촉지대,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낯섦과 몰이해 사이의 긴장에 주목한다. 영화는 결국 신비한 약초 야크루나로 향하는 목적론적 세계를 부인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바로 그 마지막 순간 등장하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는) 우주적 이미지는 근대의 시간을 부정하고 고대의 시원을 복원한다는 신화적 상징이라기보다,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로컬의 탈 식민적 역사기술을 시각화하는 창조적 카오스의 이미지 같다.
실제로 19세기 독일인 탐험가 테오도르 코흐-그룬베르크(Theodore Koch-Grunberg)와 20세기 미국인 식물학자 리차드 에반스 슐츠(Richard Evans Schultes)라는 실존인물들의 저서에서 영감을 받은 <뱀의 포옹>은 식민문학의 대표적 양식인 여행기(travelogue) 서사와 긴밀한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고 있다. 프론티어리즘에 입각한 서구적 영웅 서사와 기독교적 훈육제도, 공간이동 및 자연착취의 영역을 확대시킨 과학기술과 박물학, 휴머니즘과 이국애증, 제국주의적 욕망과 부르주아적 개인성에 바탕을 둔 여행기 양식은 유럽 식민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노골적인 얼굴이다. 그러나 여행기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정치경제적 권력과 착취에 기반한 지배/피지배라는 적대적 이분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여행기 양식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 전통과 가치를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기술자가 경험하는 긴장의 양태들인데, 이는 종종 기존의 제국주의 서사의 관습과 충돌하는 반-정복(anti-conquest) 서사와 연결된다. 그러나 반-정복 서사는 제국주의적 정복 서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헤게모니를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결백을 지켜내고 싶었던 유럽의 부르주아 주체들이 활용한 재현 전략”(메리 루이즈 플랫)이다.
<뱀의 포옹>이 서구 여행기 양식과 관련되는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가 유럽 제국주의와 맺고 있는 공모관계의 폭로라는 것이다. 영화는 테오/에반스와 카라마카테, 그리고 원주민들로 형상화되는 식민지배/피지배, 여행자/여행되는 자(travelees)라는 단순한 대립을 넘어 상이한 신념과 언어, 지식과 감정이 만나는 접촉 지대(contact zone)에서 발생하는 훨씬 복잡한 동학을 제시한다. 영화 중반의 고무나무밭 장면은 서구 자본과 (서구화된 콜롬비아인으로 제시되는) 서구 제국의 내적 주체(domestic subject), 그리고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원주민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고무 채취와 노동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분노한 마카테가 채취된 고무액을 땅에 버리고, 이를 알게 된 원주민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를 이끄는 것은 폭압에 시달린 원주민의 팔 잘린 신체가 전달하는 강렬한 폭력의 이미지,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테오의 유럽 휴머니즘의 정서다. 아마도 롤랑 조페의 <미션> 같은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해왔던 유럽 휴머니즘의 감정은 결국 마카테가 원주민을 자비롭게(!) 사살함으로써 설 자리를 잃은 채 훼손된다.
테오의 유럽/휴머니스트/부르주아 여행자의 정체성은 그의 여정 내내 계속하여 의문시된다.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의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보낸 테오는 호혜라는 관습과 가치를 평화롭게 습득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가 자고 있는 사이에 한 원주민 아이가 그의 나침반을 가져가자 테오는 사유재산이자 (유럽의) 테크놀로지/지식을 위협/강탈한 원주민에게 적대와 폭력의 민낯을 드러낸다. 상심에 빠진 테오에게 카라마카테는 ‘지식을 독점하려는’ 백인의 태도를 꼬집고 타자(유럽)의 지식을 접촉하려는 자기(원주민)의 욕망을 변호한다. 결국 테오는 결코 ‘결백하지’ 않은 것이다. 도전받는 것은 기독교/가톨릭이라는 서구 종교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원주민 아이들을 콜롬비아 자본가 세력이나 원시적 폭력에서 보호하고 훈육하는 가톨릭 신부의 종교적 자비는 원주민 언어를 사용한 아동에 대한 가혹한 채찍 형벌이라는 폭력의 얼굴을 숨기고 있다. 한편 에반스의 여정에서 등장하는 사이비 교주의 커뮤니티는 메시아라는 일원신과 교회의 제도가 원주민들에 의해 ‘번역되는’ 또 다른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제시한다.
결국 제국주의적 정복서사나 여행기 양식의 반-정복 서사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이를 전유하는 <뱀의 포옹>의 궁극적인 전략은 유럽 중심의 다위니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로컬의 경험을 역사화할 수 있는 대안적인 ‘자가 기술 민족지(autoethnography)’의 의지를 담고 있다. 영화는 단순히 유럽중심의 시각에 반하는 원시 아마존의 전통을 로컬 역사의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서구적 이성을 대변하는 테오/에반스와 원시 아마존의 철학을 들려주는 카라마카테의 부단한 대화라는 접촉지대,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낯섦과 몰이해 사이의 긴장에 주목한다. 영화는 결국 신비한 약초 야크루나로 향하는 목적론적 세계를 부인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바로 그 마지막 순간 등장하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는) 우주적 이미지는 근대의 시간을 부정하고 고대의 시원을 복원한다는 신화적 상징이라기보다,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로컬의 탈 식민적 역사기술을 시각화하는 창조적 카오스의 이미지 같다.

3.
플랫은 여행서사가 유행했던 근대 유럽의 소위 ‘지구적 차원의 의식’이 근거했던 과학 담론, 특히 박물학과 분류학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여행기 양식이 제공하는 가장 커다란 매혹은 낯선 공간과 이질적 문화라는 대상이다. 여행기는 이 낯선 사물들을 박물관마냥 채집한다. 어떤 사물의 이질성과 낯섦을 규정짓는 것은 그것의 낯선 배치, 즉 무질서다. 여행기는 이 사물의 무질서에 대한 보는 이의 매혹과 동시에 이를 다시 질서화하려는 어떤 욕망, 즉 분류학자의 의지를 가진다.
19세기 독일의 탐험가 테오는 전형적인 채집가이자 분류학자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면서도 그가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은 나비 채집본과 기록, 그리고 원주민들의 사진이다. 채집가인 테오에게 사진은 기억의 담지물, 탐사의 증거다. 테오가 카라타마테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사진은 속이 텅 빈 채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도는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출라차키)일 뿐이라고 답한다. 카라마카테의 사진을 유럽인들에게 보여줘도 된다는 허락을 받자 테오는 그에게 목걸이로 보답하지만 그는 거부한다. 이 장면은 이미지-기억의 가치에 대한 상이한 개념과 감각이 만나는 접촉지대 그 자체를 보여준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에반스가 버리지 못하는 축음기 역시 마찬가지다. 테오/에반스와 카라카마테의 대화들에서 기억저장소인 복제-이미지와 그 채집은 다르게 해석되거나 혹은 부인된다. 무엇보다 테오의 여행기는 영화 안에서 완성되지 못하며 심지어 사실 에반스는 가짜 탐사가/채집가이다.
실패한 여행가/채집가로서의 테오/에반스가 서사적 차원에서 유럽 민족지 담론에서 벗어나는 전략이라면, <뱀의 포옹>이 담아내는 경이로운 아마존의 풍경은 ‘이미지-보는 이’라는 영화적 차원에서 타자를 대상화하는 시각적 민족지이길 거부한다. 6년이 넘는 제작기간을 거쳐 영화는 콜롬비아 아마존의 원주민 문화를 꼼꼼하게 담아내는 동시에(실제로 치로 게라는 5개 이상의 원주민 언어를 이용하여 시나리오를 완성했으며 카라마카테를 비롯한 원주민 캐릭터는 실제 원주민을 캐스팅했다) 아마존의 풍경을 경이로운 흑백 파노라마 화면으로 ‘채집한다’. 무한한 지평선을 그리는 강,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만이 존재하는 원시의 고원, 헬리캠으로 촬영된 대지는 근대 인간의 개입이 차단된 자연 그대로의 이미지, 칸트적 숭고의 이미지다.
그러나 테오/에반스는 결코 영화 안에서 이 이미지들을 포획하는 시선의 담지자로 구성되지 않는다. 쇼트-역쇼트의 구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아마존의 풍경과 원주민의 이미지들은 테오/에반스의 시점쇼트에 대한 수동적 대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자연과 테오/에반스, 카라마카테, 원주민들은 하나의 공간(프레임) 안에 배치된다. 나아가 이 숭고한 자연-이미지들은 광학적/디지털 복제물로서의 스스로의 본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테오/에반스에게 포획되기도 분류되기도 거부하는 이 이미지들은 스크린-이미지를 ‘보는 이’인 우리에게도 포획되거나 분류되길 거부한다. 오히려 영화의 응시는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표범이나 뱀의 눈처럼 비-인간의 시선을 통해 구성되며 무질서로서의 자연-이미지는 기존의 분류/질서에 따른 풍경화(landscape)이길 거부한다. 이런 방식으로 <뱀의 포옹>은 흑백-파노라마라는 광학 이미지에 각인된 지배적 질서와 가치(원시로서의 아마존과 헐벗은 신체, 기억저장장치로서의 카메라/축음기, 채집된 증거로서의 복제 이미지)로부터 보는 이인 우리를 해방시키고 이미지-관람자 사이의 자유로운 접촉을 촉구하면서 서구 민족지 기술을 해체하는 정치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