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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발리에

아디너 레이첼 창가리, 2015

슈발리에  대표 이미지

지난해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이 주관해 온 ‘사사로운 리스트’라는 기획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작품의 완성도나 품격, 내외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들의 목록. 이 기획은 ‘좋은 영화’, ‘가치 있는 영화’, ‘완성도 높은 영화’의 순위를 매길 때 준용되는 식상한 목록의 기준을 저버려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공인된 평판작이나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 먼저 알려진 영화들은 가급적 배제하고자 했다. 기획자들의 취지에 부응하는 의미로 순전한 사사로움을 기준삼아 아래 10편의 작품을 골랐다. 

가장 먼저 무빙 이미지의 창조적인 화용론을 보여주는 신작들이 눈에 띈다. 로이스 파티뇨의 <나이트 위드아웃 디스턴스>, 피터 보 랩먼드의 <토포필리아>, 가이 매딘/ 에반 존슨의 <금지된 방>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이트 위드아웃 디스턴스>와 <토포필리아>에서 이미지의 탐험가인 두 감독은 때로는 회화, 때로는 사진을 연상시키는 풍경의 경이로움을 통해 순수 이미지의 조형과 리듬이 주는 감흥을 만끽하도록 만든다. 영화적 풍경의 영기가 발산되는 두 작품은 오늘날 영화가 닿을 수 있는 표현의 지평이 어디까지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역작이다. 무성영화의 영혼이 전편을 장악하고 있는 가이 매딘의 <금지된 방>은 매딘의 전매특허와 같은, 유령과 환영을 따라 꿈의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신비로운 체험을 제공한다. 칠레의 대문호 로베르토 볼라뇨의 역작 ‘2666’을 모체로 한 <산타 테레세 앤드 아더 스토리스>는 신성과 악의 미로를 헤매는 시대의 정황을 ‘산타 테레사’라고 하는, 멕시코의 가상공간을 무대로 구성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아방가르의 화법을 유려하게 오가는 이 영화는 올해 본 가장 혁신적이고 용기가 있는 작품이었다. 지난 10월 5일 영면한 벨기에 출신의 아방가르드 감독 샹탈 애커만의 유작인 <노 홈 무비>는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집’의 상실을 메타포로 헐벗고 굶주린 이미지들을 만들어놓은 에세이 필름이다. 

극영화 중에는 찰리 카우프만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감독 듀크 존슨이 합작한 <아노말리사>가 단연 돋보인다. 찰리 카우프만이 왜 위대한 작가인지를 통절하게 만드는 <아노말리사>는 한 작가의 강박적인 정신세계를 탐문하는 고도의 심리드라마이다. ‘사운드 연극’으로 기획되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집착과 강박, 로맨스, 악몽이 교차하면서 무엇이 우리를 진짜 인간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루마니의 뉴웨이브의 주역인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트레저>, 아르노 데스플레샹의 <내 청춘 시절의 세 가지 추억>, 미겔 고미쉬의 <천일야화>,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의 <슈발리에>도 해당 작가의 개성과 스타일이 십분 발휘된 작품들이다. 

이들 가운데 <슈발리에>를 간판으로 소개하고 싶다. <슈발리에>는 그리스 여성감독이자 제작자로 명성이 높은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가 <아텐버그>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장편영화이다. <비포 미드나잇>, <송곳니> <더 랍스터>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프로듀서이기도 한 창가리의 이 야심작은 배타적인 남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경쟁 본능이 야기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에 대한 냉정침착한 관찰기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유럽영화계에서 새로운 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정도로 괄목상대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리스 영화의 저력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연출자는 여성이지만 영화에는 (전화 목소리로 출연하는 이를 제외하면)단 한 명의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2012년 창가리가 만든 중편영화 <캡슐>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진 <캡슐>은 동성 집단 안에서 권력과 통제에 관한 영화였는데, <슈발리에>에서 창가리는 남자들의 커뮤니티로 표적을 이동하였다. 

에게 해 한가운데에 뜬 럭셔리 요트에 6명의 남성 선원들이 모인다. 다소 권태로운 호화 요트 여행. 남자들은 어느날 저녁을 먹다 ‘슈발리에’라는 게임을 하기로 뜻을 모은다. 게임의 ‘목적은 누가 더 멋지고 훌륭한 남자인가?’ 를 가리는 것. 요컨대 의협(義俠)을 선발하는 이 게임은 한 사람에 대해 나머지 다섯 명이 점수를 매겨 최고점을 얻은 이에게 승자의 영예가 돌아간다. 한 마디로 선하고 의로운 말과 행위를 통해 용기와 정의를 수호하는 사도를 찾는 게임인 셈이다. 게임에 돌입한 선원들은 잠자는 자세에서부터 다이어트 습관, 발기된 성기의 길이 등을 측정하면서 누가 더 멋진(?) 남성인가를 겨룬다. 그러나 반지를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이들의 황당무계한 게임은 아군이 없는 적대적인 무한경쟁으로 치닫는다. 

<슈발리에>는 시스템의 통제에 대한 우화이자 블랙코미디이다. ‘버디가 없는 버디무비’ 라는 카피를 단 영화는 여섯 명의 이성애자 남자들이 수컷의 공격성을 한껏 부풀리면서 벌이는 경쟁을 희화화한다. 남성들 간의 경쟁심이 점점 체면과 품격, 선의를 상실하는 과정이 점입가경의 상황들을 통해 전달된다. 요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이는 게임은 얄팍한 이해관계 앞에 신의와 우정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입증한다. 남자들만의 공동체를 무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 저들의 어리석음을 구경하는 관찰적인 시선이 긴장과 쓴웃음을 자아낸다. 아티나 레이첼 창가리 영화의 특징은 흡사 동물의 행동을 대면하는 것 같은 경험을 제공하면서 인간 행위를 응시하게 만드는 인류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그는 럭셔리 요트라는 제한된 공간에 남성-동물을 가두고 그들의 기벽을 관찰하면서 섹슈얼리티와 죽음, 폭력, 사회구조의 속살을 파헤친다. 수컷들의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는 비합리성의 세계는 남성들의 집단의식을 풍자하는 비틀어진 코미디로 형상화된다. 창가리는 남성의 세계, 통제와 길들이기, 인간의 아둔함, 집단 안에서의 불가사의한 영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거리두기의 방식을 동원하여 인상적인 연출을 보여준다. 집단의 광기와 이기라는 이슈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연출자의 감정이나 의도가 거의 섞여 있지 않은 영화는 사회적 관계와 태도를 질기게 붙잡고 있다. 

<슈발리에>는 남성성의 신화와 그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남성, 부성, 가부장의 어위군들이 불신의 눈초리를 받는 이 시대에 남성들의 세계는 타자성의 세계로 묘사된다. 이성애 집단 안에서 하나의 성(여성)을 제거한다면 그들 내부에서 권력과 욕망은 어떻게 일그러지는가? 이 불구적인 욕망의 일탈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의 산물인 영화는 용렬한 인간의 민낯을 가차없이 발가벗긴다. 한편으로 <슈발리에>는 창가리가 ‘스크루볼 비극’이라고 부르는 장르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다. 부분적으로 영화는 스크루볼 재담극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일부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과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실험으로도 보이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의 억양과 톤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말의 억양은 하나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언어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했다. <슈발리에>에서 모든 인물들은 양식화된 대화를 나누고 때론 웅변을, 때론 노래를, 때론 시를 읊는다. 내러티브가 진행될수록 말의 리듬과 운율이 희비극의 양면을 내포한 작품과 기이하게 호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슈발리에>에서 자기애에 들든 과시적인 남자들을 통해 세상을 풀이하려 하는 창가리의 시선은 염세적이다. 풍자코미디의 끝은 대게 허무하지만, 이성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광기에 대해 준열히 꾸짖기보다 속절없이 인간의 괴상한 행동을 목격하도록 만드는 것이 연출의 목적이다. 전투적인 경쟁과 교활함, 자애로운 연대를 가장한 탐욕은 점점 더 불신과 배반을 전염시킨다. 여기에 가담하는 것이 통제의 매커니즘이다. 상호견제와 긴장으로 점철된 게임은 질서유지와 통제의 수단이 된다. 여섯 남자들의 게임을 주관하는 시스템(선장과 그의 조력자들)은 불모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체제유지의 밸런스를 부산물로 얻으려 한다. 이 지배와 통제의 무한질주를 제어할 만한 시스템은 없으며 관객들은 점차 쩨쩨하고 비열해지는 인간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군데군데 유머아 기지가 넘치는 장면들이 여럿 있고, 존재의 무능을 확인하는 나른함이 사지를 옥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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