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영화리스트
엑스 마키나
알렉스 가랜드, 2015
연말 리스트 짜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원래부터 줄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소위 ‘객관적인’ 리스트들을 짜다 보면 정작 그해에 진짜로 좋게 본 영화들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리스트에서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넉넉하게 가기로 했다. 이들은 심지어 가장 재미있게 보거나 좋게 본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냥 내 기억 속에 달라붙은 영화들이고 또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들이다.
일단 <그랜마>는 릴리 톰린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면서 뻔뻔스러운 할머니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동스럽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노장의 힘을 보여주는 거의 완벽한 장르물이었다. <무서운집>은 심지어 한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노장감독이 컬트 현상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팔로우>는 오래전에 바닥이 드러난 것처럼 보였던 ‘십 대 아이들 괴롭히기’ 호러의 영역에 미개척지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월드 오브 투모로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올해 최고의 SF다. 60년대의 폴란드와 대화를 나누는 <이다>의 교령의식은 오싹한 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필리핀에서 만들어진 깜찍한 퀴어 소녀의 성장물인 <아니타의 마지막 차차차>는 여성영화제 바깥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싶은 영화였고 <나이트 크롤러>는 대한민국에서 뉴스와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 전에 한 번은 의무시청해야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더 듀크 오브 버건디>에 대해 말할 거 같으면... 어떻게 크레디트에 “Perfume by Je Suis Gizella”라고 박는 영화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28일 후>의 작가 알렉스 갈란드의 감독 데뷔작인 <엑스 마키나>다. 최고의 SF는 <월드 오브 투모로우>가 차지했고 그 뒤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뒤에 바짝 붙어 있으니 올해의 SF로는 3위 정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영화이고 이야기할 거리도 많다.
<엑스 마키나>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그 전형성이다. <엑스 마키나>는 인간형 로봇 이야기다. 굉장히 흔해빠진 설정이고 역사도 깊다. SF만 따져도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의 「미래의 이브」로 거슬러 갈 수 있고 아이디어만 따진다면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도 있다. 태초부터 사람들은 인간을 닮은 무언가를 만드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따지고 보면 「창세기」를 포함한 모든 창조 신화들이 담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욕망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엑스 마키나>에 대한 기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척 봐도 아름다운 여자 모습을 한 로봇 이야기이니 이성애자 남성 작가의 판타지가 노골적이다. 그리고 판타지나 SF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작가의 욕망 자체이다. 이야기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욕망에 충실해 포르노로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포르노의 외설성이 아니라 지루함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이야기는 지겹기 마련이다. 오히려 그 뒤에 나올 닐 블롬캠프의 <채피>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예측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영화에는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모습을 한 여성 로봇 에이바에 대한 쾌락적인 추구가 무시할 수 없을 비중으로 존재한다. 이런 추구는 소노야 미즈노가 연기한 쿄코에겐 더욱 노골적이다. 그리고 이름이 에이바가 뭔가. 꼭 이런 여자 모양의 로봇에겐 이브에서 파생된 이름을 붙어야 하나?
하지만 갈란드는 자신의 욕망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과학적 정직성을 잃지 않는다. 이 점이 큰 기대를 모았지만 확실하게 망해버렸던 로봇 영화 <채피>와 <엑스 마키나>를 갈라놓는 부분이다.
여기서 <채피> 이야기를 조금 하겠다. 이 영화는 <엑스 마키나>의 거의 정확한 대척점에 있어서 비교용으로 거의 이상적이다.
얼핏 보면 대량생산된 투박한 경찰 로봇인 채피가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인 외모를 하고 있는 에이바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사실적인’ 외양 밑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라. 과학, 논리, 철학 중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다. <채피>에서 주인공 로봇은 그냥 로봇 시대의 피노키오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원형적인 이야기에 채피를 맞추기 위해 그들은 뭐든지 하는데 그 과정 중엔 최소한의 고민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이들은 채피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림은 예술이고 예술을 할 줄 아는 존재라면 영혼이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정작 채피가 그린 그림은 아이패드 그림 앱으로 사진을 가공해 프린터로 찍은 것처럼 기계적이다. 구도에서부터 붓놀림에 이르기까지 해석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이미지를 보고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중요한 질문이지만 <채피>는 안 한다. 영화 내내 그렇다.
하지만 <엑스 마키나>는 질문을 한다. SF 영화로서 <엑스 마키나>의 가장 큰 장점은 굳이 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알아서 이해하고 넘어가 줄 부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영화화된 TED 강의’라고도 이죽거리기도 한다던데, 이게 그렇게 큰 단점인지는 모르겠다. 그 질문과 대답이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정확하며 재미있다면 그게 문제가 되나?
내가 미리 설정해 놓은 기준점을 <엑스 마키나>가 넘은 순간은 에이바의 성을 건드렸을 때였다. 많은 SF가 당연시하고 넘어가지만 절대로 당연하지 않은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인간형 로봇은 여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남자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로 인간 여자나 남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근거가 있는가? 많은 작가들이 이 부분을 건너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감정 이입하는 남자 주인공과 로봇이 섹스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로봇이 ‘여자’가 아니더라도 섹스는 할 수 있지만 그 즐거움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엑스 마키나>는 그 질문을 한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게 영화의 핵심이다. 에이바를 만든 천재 과학자 네이든은 자신이 에이바를 이성애자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에이바가 진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에이바의 내면은 강제로 분석할 수 없는 블랙박스이기 때문에 그에겐 일종의 튜링 테스트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회사의 직원인 카일렙을 불러와 테스트를 시킨다. 카일렙은 에이바를 사랑하게 되고 그 로봇을 네이든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뭐든지 할 생각이다. 하지만 에이바는 어떤가? 에이바는 네이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그 감정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만약 에이바가 인간 여성의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행동할 것인가? 게으른 작가들은 ‘그냥 그렇게 프로그램했다’라고 얼버무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엑스 마키나>는 답을 갖고 있다.
SF는 오래된 장르이다. 어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1세기가 넘었다. 과학이 매서운 속도로 발전한 20세기와 21세기를 통과하면서 1백 살의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옛날엔 당연한 관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었던 것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우린 레이 브래드베리가 그린 로맨틱한 고대의 화성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나사가 보낸 로봇들이 보내온 자료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이야기는 전설로 남고 SF는 현대 과학의 논리에 맞추어 계속 전진을 해야 한다. 그 과학과 논리는 현재의 지식일 수도 있고 이전 것보다 발전된 가설일 수도 있으며 그냥 이전엔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잘못된 상식이나 관습의 수정일 수도 있다.
최근 들어 인공지능과 특이점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나왔다. <엑스 마키나>와 <채피>를 빼더라도 <빅 히어로>와 <그녀> 같은 작품들이 있는데, <채피>를 제외한 모든 영화들은 다가올 인공 지능에 대한 21세기 초의 상상력을 반영한다. 물론 이 상상력의 결과물이 정확한 예측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들 특이점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이게 오긴 할까? 정말 인공지능은 스스로의 자아를 갖게 될까? 상관없다. SF가 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토 자체이기 때문이다.